◇<나의 독재자> 포스터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최근 SNS를 감동으로 휩쓴 글이 하나 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떤 할머니의 이야기다. 남루한 행색으로 딸 이름도 기억 못하는 이 할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우리 딸이 애를 낳고 병원에 있다"고만 되내였다. 수소문 끝에 딸이 입원한 병원을 찾았고, 그 보따리에는 식은 국과 밥, 나물이 들어있었다. 치매를 앓고 있음에도 '딸이 아이를 낳았다'는 기억은 놓지 못한 이 할머니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영화 <나의 독재자>는 마치 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극화한 느낌이다. 아들에게 망신을 줬다는 마음에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아들 앞에서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주고 싶은 무명 배우의 이야기다.
◇설경구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는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했던 시절, 한 무명 연극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긴 무명시절 끝에 찾아온 기회, 아들과 아들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은 이 연극인은 희대의 찬스를 스포트라이트 앞에서 물거품으로 날려버린다. 무엇보다 상심이 큰 건 아들에게 망신을 줬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정부는 비밀프로젝트를 꾸린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의 가상 리허설을 꾸려보자는 것이다. 무자비할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한 뒤 가장 입이 무거운 무명 배우를 김일성 대역으로 삼는다. 설경구가 연기한 성근이 그 인물이다.
아내는 병들어 죽었고,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둔 성근은 아들 앞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치고 싶다. 이 때문에 연기를 배우고, 살을 찌우고, 뒤통수를 긁으며 혹을 만들고 북한의 사상을 체화하며 김일성이 돼 갔다.
하지만 유신독재와 함께 남북정상회담은 취소되고 아들에게 보여줄 무대는 사라졌다. 성근은 김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처만 남는다.
◇박해일-설경구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아버지를 누구보다 따랐던 태식(박해일 분)은 이제 아버지가 밉다. 자신을 버리고 탈북을 하려했던 아버지, 태식이라고 부르지 않고 '정일이'라고 부르는 아버지, 자신을 보살펴준 간호사에게 총살을 강요하는 아버지, '인민을 배불리 해야한다'는 아버지가 싫다. 그렇게 요양원에 아버지를 버린다.
사채업자에 쫓기고 다단계를 하며 억지로 살아가는 태식이다. 힘겨운 하루가 계속되던 날 우연히 아버지가 김일성 역할을 하며 받은 분당의 집이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집을 팔고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찾는다.
다시 만난 아버지는 여전히 밉다. 남조선통일을 외치고 마트에 가서 곡식을 이렇게 쌓아두면 어떡하냐며 인민들을 챙겨주라고 점장의 멱살을 잡는 아버지가 밉다. 다 집어치우고 싶어진 그런 상황에 사라졌던 무대가 다시 생겨난다. 20여년 만에 대통령을 상대로 리허설을 할 기회가 생긴다. 아버지는 조건을 단다. '아들이 보게 해달라'
청와대에 오른 아버지는 최고의 무대에 선다. 마지막 무대고 관객은 아들 단 하나다.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친 아버지의 등에는 땀이 흠뻑 젖어있다.
◇설경구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두 가지의 핵심 축이 있다. 김일성과 부정이다. 그 중심에는 설경구가 서있다. 설경구하면 떠오르는 연기 톤이 있다. <박하사탕>, <공공의 적>, <실미도> 등으로 이어지는 강한 남자가 그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이 된 설경구는 완전히 다른 연기를 펼친다. 진부함이라고는 전혀 없다. 극중 성근처럼 인생 연기를 펼치는 설경구다.
얼굴이 많다. 친구 같은 아버지, 연기 못하는 배우, 김일성이 돼가는 과정의 광기, 김일성의 얼굴까지 설경구는 20년 동안 시간이 흐르는 과정의 다양한 얼굴의 성근을 완벽히 소화한다. 이번 설경구의 연기를 스크린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티켓 값은 가치를 한다. 설경구는 <나의 독재자>에서 '스크린의 독재자'였다.
아들 태식을 연기한 박해일은 깔끔하다. 군더더기 없다. 모성을 자극하는 그의 비주얼은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설경구가 원맨쇼를 펼치는데 현실적인 아들의 이미지로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이병준, 윤제문, 류혜영, 배성우 등도 훌륭하다. 연기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장면은 단 하나도 없다.
<나의 독재자>는 나보다는 자식이 먼저인 이 시대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영화다. 아들에게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응어리를 평생동안 간직해나가는 성근을 통해 이 시대에 아버지들에게 고맙다고 전하는 영화다. 마지막 박해일의 눈물이 짙게 흐르는 건 그만큼 고마움이 크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 아버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아버지의 인생에 방해가 되진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나의 독재자>다. 오는 30일에는 우리집의 독재자의 손을 잡고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영화 한 편 보길 추천한다.
30일 개봉. 상영시간 1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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