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그리스가 제출한 개혁안이 유로그룹의 승인을 얻어 '그렉시트(Grexit)' 우려감이 일부 해소됐다.
그러나, 국제 채권단이 그리스 정부의 개혁 의지를 확인하기 전까지 지원금을 내놓지 않을 것이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그리스 문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리스, 구제금융 4개월 연장..긴축 놓고 추가 협상 남아
가디언은 24일(현지시간) 그리스 좌파정부가 국제 채권단과 어떤 식으로 산적한 부채를 줄이고 긴축 프로그램을 가동할지를 놓고 지루한 협상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이 아테네 의회에 들어서고 있
다. (사진=로이터통신)
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인 유로그룹이 이날 그리스의 경제 개혁 리스트를 검토한 후 구제금융 만기를 4개월 연기해 주기로 합의했지만, 안심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유로그룹은 이번 개혁안에 담긴 세수 확보와 예산 삭감안에 동의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약속대로 구제금융 만기일을 오는 28일에서 4개월 후인 6월로 연기해줬다.
다만, 유로그룹은 개혁안의 세부 내용이 불명확하다며 더 자세하고 광범위한 내용을 그리스 당국에 추가로 요구했다. 전 정부가 수립했던 구제금융 협정문과 비교했을 때 내용이 모호하고 불명확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혹평은 그리스가 세수를 언제까지 얼마나 확보할지, 예산 감축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를 수치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측면이 있다.
예룬 데이셀블룸 유로그룹 의장은 "그리스 정부는 과도하게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며 "조세 정의를 세워서 얼마나 많은 세수를 확보할 수 있을지 아무런 언급도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사진)이 유로그룹에 제출한 6페이지짜리 개혁안 원문을 보면, 정확한 수치가 명시돼 있지 않다.
로이터통신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바루파키스는 과세강화와 반부패, 예산 타당성 검토 등 유로그룹이 요구했던 조건을 개혁안에 담았다.
민영화 종료와 사회복지 강화, 최저임금 인상 등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밀어붙이고 있는 정책도 포함시켰다. 다만, 유로존 당국자들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종전보다 수위를 대폭 낮췄다.
그리스는 또 "긴축으로 인해 벌어진 인도주의적 위기에 맞서는 노력은 재정 건전성을 강화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긴축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되 그에 따르는 부작용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어느정도 쓸돈은 쓰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그리스는 국제 채권단의 요구와 자신들의 핵심 정책을 잘 버무리기는 했지만, 수치는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IMF·ECB, 그리스 개혁안에 '회의적'.."정확한 수치 내놔라"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중앙은행(ECB) 등 그리스에 돈을 꿔준 국제 채권단도 바로 이 점 때문에 개혁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들 국제 채권단은 유로그룹처럼 그리스에 구체화 된 개혁안을 추가로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걸 주기 전까지 최종 구제금융 72억유로를 지급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그리스 개혁안에 바로 환영하는 입장을 내비친 것과 대조된다.
그리스 개혁안에 대한 채권단의 불만을 확인시켜 주듯 IMF와 ECB 수장은 그리스 정부에 강한 개혁 의지를 보이라고 촉구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이날 예룬 데이셀블룸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고 "개혁안의 내용이 너무 불분명하다"며 "연금과 세금, 민영화 부문에서 더 확실한 청사진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도 개혁안에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예전의 협정문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며 "그리스 정부는 신속하게 지급 시스템을 안정화시키고 다른 회원국들에 반하는 독단적인 행동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드라기는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한 대출을 언제 허용해 줄지도 언급하지 않았다. 3주 전 ECB는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추가 자금 대출을 중단한 바 있다.
양대 기관의 수장들이 강경하게 나오자 예룬 데이셀블룸 의장(사진)은 채무 탕감이란 파격적인 유인책까지 거론하며 그리스의 긴축 의지를 이끌어내려 애썼다.
예룬 데이셀블룸 의장은 "그리스가 지난 2012년 11월 2차 구제금융 협정문에 명시한 대로 모든 내용을 지킨다면 채무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다"며 "이건 이제까지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IMF, EU, ECB 등 트로이카 국제 채권단은 2012년 11월 당시 그리스의 기초재정수지가 흑자를 내면 채무상환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논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재정수지 흑자는 긴축과 증세를 병행하면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스의 반긴축 행보를 불만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유로존 회원국들도 덩달아 쓴소리를 냈다. 피터 카지미르 슬로바키아 재무장관은 "그리스는 오는 4월 말까지 부담되는 일도 많이 해야 할 것"이라며 "우리는 숫자를 보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콥 커키가드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유로존 당국은 그리스가 경제 개혁 의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자금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란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고 진단했다.
◇그리스 디폴트 위기감 '여전'..3차 구제금융 협상도 부담
그리스 연립정부 내부에서도 쓴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부 중진 의원들은 그리스 정부가 트로이카 채권단의 협박에 굴복했다며 치프라스 총리의 협상 행위를 '배신'으로 규정했다.
특히, 우파 국수주의자들의 반대가 극심하다. 이들은 독일이 주도하는 긴축정책을 심각한 주권 침해로 본다.
물론 대다수의 의원들은 어느 정도 협상이 필요했다는 '현실론'에 무게를 두고 있어 치프라스 총리의 입지가 흔들릴 여지는 적다.
실제로 그리스는 채권단과 긴축을 놓고 옥신각신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부채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스가 부채 상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금이 있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다음 달까지 버티는게 고작일 것이란 의견이 유로존 정치권의 중론이다. 다음 달이면 그리스가 IMF에 진 채무 14억유로의 만기가 돌아온다.
문제는 그 이후다. ECB 채무 만기일은 오는 7월20일에 35억유로, 8월20일 32억유로로 각각 잡혀있다.
채무 만기일이 줄줄이 이어져 한번 이라도 제때 돈을 갚지 못하면 그리스는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인 그렉시트로 이어진다.
ECB에 진 빚만 따져봐도 그리스는 오는 7월까지 최소 67억유로의 자금이 필요하다.
트로이카가 약속한 2차 구제금융 72억유로가 그리스에 절실한 이유다. 이 돈은 그리스가 수치 등을 포함한 새 개혁안을 내놓고 그걸 제대로 실행한다는 조건 아래서 오는 4월 말에 지급될 예정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2차 구제금융이 종료되는 4개월 후, 즉 7월이 되면 치프라스 총리는 추가 자금을 따내기 위해 3차 구제금융 협상에 돌입해야 한다.
그리스 정부의 한 관료는 "EU와 IMF 등 채권단과 함께 어떻게 올해 자금 부족분을 메울 수 있을지 바로 논의를 시작할 계획"이라며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 시작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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