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빠른 속도로 필라델피아 곡선 선로를 통과하고 있다. 법정 제한 속도는 50마일인데 이 열차는 무려 106마일로 내달린다. 누가 봐도 과속이다. 탑승객들이 불안감을 느낄 때쯤 열차는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선로에서 벗어났고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 사고로 안에 있던 승객 8명이 죽고 200여명이 다쳤다. 열차 사고의 원인은 과속일까, 아니면 선로 이상일까? 언뜻 보면 과속이 사고의 일차 원인 같지만, 미국 여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노후화된 선로가 열차의 하중을 감당하지 못해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미국 인프라 투자규모, 최저수준
미국에서 때아닌 인프라 확대 바람이 일고 있다. 핵심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후진국형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는 지적이 빗발친다. 지난 12일 밤 워싱턴발 뉴욕행 열차가 탈선 뒤 전복됐다는 소식이 주요 매체를 통해 보도됐을 때도 인프라를 재구축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재계와 노동계 인사 수천명은 정부에 인프라 개보수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에 안보만 있고 안전은 없다며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인프라와 관련된 수치를 보면 미국이 어쩌다 분위기에 휩싸였는지 이해가 된다. 부르킹스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인프라 투자는 1979년부터 작년까지 제자리걸음을 했고 그 여파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인프라 투자 비중은 현재 2.5%까지 떨어졌다. 이는 선진국 평균인 3.0%와 캐나다와 호주, 한국의 3.9%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다. 중국(9~12%)과 비교하면 미국이 인프라 투자에 얼마나 인색한지를 알 수 있다. 에드 렌델 전 펜실베니아 주지사는 열차 탈선 사고 직후 "우리의 인프라가 얼마나 열악한지 증명됐다"며 “아시아나 유럽을 가보면 고속철이 있는데 마치 화살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우리 인프라를 생각하면 너무나 창피하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문을 나서고 있다. (사진=로이터)
예산이 적게 책정됐는데 시설 상태가 좋을 리가 없다. 실제로 지난 2013년 미국토목학회(ASCE)는 미국의 도로와 다리 제방. 댐, 기차역 공항 등 핵심 인프라 시설에 대해 D+ 점수를 부여했다. 최저점인 F를 겨우 모면한 것. 다른 자료들을 봐도 결과는 비슷하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미국 도로의 수준은 세계 7등에서 현재 18등으로 곤두박질쳤다. 미국에 가보면 여기가 선진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금이 가거나 조각난 도로투성이다. 미국 내 60만7380개의 다리 중 9개는 기술적인 결함이 발견됐음에도 방치되고 있다. 미국 다리의 평균 사용 기간은 42년에 육박한다.
물론 어떤 결함이 있다고 인프라 투자를 무작정 늘릴 수는 없다. 어느 한 쪽의 예산이 증액되면 보육이나 의료, 국방 예산 등의 예산이 깎이기 때문에 투자 대비 효율성과 시급성을 종합해서 고려한 뒤 예산을 배분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모든 면을 분석한 결과, 인프라 투자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예산이 동일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인프라 투자가 경제·사회적 이득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기관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맥킨지 글로벌 인스티투트는 오는 2020년까지 인프라 부문에 1500억달러를 투입하면 연간 GDP의 1.5%가 증가하고 일자리는 1800만개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한다.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면 자연재해로 인한 엄청난 비용도 줄일 수 있다.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넥스트시티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자연재해로 44개 주에서 무려 2270억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대중교통 인프라가 확대되면 출퇴근 길에 자가용 운전자 수가 줄어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에도 도움이 된다. 낙후된 지역까지 도로가 뚫리면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장점도 있다.
◇공화당 반대에 투자금 확보 가시밭길
인프라 투자에 따르는 다양한 이점에 일찍 눈을 뜬 주 정부들은 연방정부가 활동을 멈춘 사이 각종 인프라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뉴욕은 향후 18년 동안 24억달러를 들여 친환경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모토 아래 건물 옥상에 과일나무를 심는 한편, 도로와 토양의 투과성을 높일 예정이다. 인프라가 구축되면 폭우가 수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다. 시애틀과 보스턴 주정부는 '비전 제로'란 슬로건을 걸고 교통 사고율을 0%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교통 인프라에 자원을 집중할 계획이다. 이 정책에는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다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철학이 반영됐다.
공화당의 반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인프라 투자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는 뜻을 재천명했다. 지난 14일 오바마는 양당 의원들과의 미팅에서 “우리가 계속 성장하려면 인프라 투자를 꾸준히 늘려야 한다”며 “위대한 나라들은 다 그렇게 해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세수를 확보할 만한 모든 자금출처를 공개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라며 “나는 공화당과 협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오바마는 오는 2016년 회계연도까지 인프라 투자규모를 900억달러 더 증액하길 원한다며 액수도 제시했다.
그러나 투자자금을 확보하려면 공화당의 반대를 뚫어야 해 가시밭길이 예상된다. 미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예산을 증액하면 부채 규모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긴축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앞서 열차 사고가 났을 때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 의장은 “속도가 과했기 때문에 열차가 선로에서 이탈한 것이 확실하다”며 인프라 예산 증액 반대 입장을 우회적으로 시사했다. 전문가들은 공화당과 오바마 대통령이 인프라 예산을 놓고 한동안 대립각을 세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석진 기자 ddagu@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선영 아이비토마토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