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성원기자]순간의 판단이 미래를 결정한다. 좀더 나은 내일을 위해 우직하게 걸어온 당신. 그러나 지금도 누군가는 당신의 행복을 빼앗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교묘한 혀를 놀려 애써 가꾼 과실을 가로채는가 하면,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철저히 짓밟기도 한다. 보이스피싱과 불법사채라는 공공의 적(敵)! 그들은 소시민의 눈물과 후회를 자양분 삼아 곳곳에 뿌리를 박고 가시를 드러낸다. 토마토TV는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서민금융 피해실태와 바람직한 대처방안을 3회에 걸쳐 진단한다.[편집자주]
"아무튼 말입니다, 돈만 회수되면 애는 바로 도킹시켜드립니다."
유괴범은 상우의 부모에게 거액의 현금을 요구한다. 범인은 미리 녹음해둔 상우의 음성을 부모에게 들려주며 이들을 유인했고, 결국 돈을 뜯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상우는 이미 살해된 지 오래다. 지난 2007년 개봉한 영화 '그놈 목소리'의 줄거리다.
'그놈 목소리'는 실화에 바탕을 둔 픽션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전화', '유인', '돈'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해부하면 우리 일상 속에 침투한 위험요소로 눈을 돌릴 수 있다. ▲ 난데 없이 울리는 전화벨 ▲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교묘한 세치 혀 ▲ 돈으로 해결이 가능한 절박한 상황.
이 세가지 조건이 맞물려있다면 의심해봐야 한다. 이제 또 다른 '그놈 목소리'는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노리고 있다.
◇ 보이스피싱..어디까지 가나
보이스피싱에 대한 공식적인 집계는 지난 2006년 6월 시작됐다.
초창기에는 일종의 '충격요법'이 등장했다. 자녀가 하교할 시간에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자식을 납치했다며 돈을 요구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전형적인 '그놈'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으로 실제 피해를 당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핸드폰이나 학교에 전화를 걸어 진위 여부를 확인했고, 언론을 통해 비슷한 수법이 알려지면서 유괴나 납치를 가장한 사기는 점차 자취를 감추는 추세다.
그러나 이제 보이스피싱은 일상 생활을 교묘하게 파고들고 있다. 경찰청, 검찰청, 국세청 등 공공기관을 빙자하거나 은행, 보험사 직원을 사칭하는 수법이 동원된다.
최근에는 금융회사의 이벤트에 당첨됐다거나 우체국 택배가 배달됐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례가 신고되고 있다. 전화를 거는 목적 역시 노골적인 입금요구에서부터 2차 범죄를 위한 개인정보 빼내기까지 점차 다양해지는 상황이다.
해마다 피해건수가 늘어난 것도 이 같은 수법이 먹혔들었기 때문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006년 하반기 1487건이었던 보이스피싱 피해사례는 2007년 3979건, 2008년 8445건으로 매년 급증했다.
피해금액도 같은 기간 106억원(2006년 하반기), 434억원(2007년), 876억원(2008년)으로 불어났다. 올해 들어서는 4월말 현재 약 3000건이 신고됐다. 피해금액은 287억원에 이른다.
경찰청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유형을 일일이 분류하기 어렵지만 큰 흐름에서 볼 때 방법이 교묘해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 투박한 조선족 전화 목소리..요주의
경찰은 보이스피싱의 진원지로 중국을 지목하고 있다. 국내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보이스피싱 사건이 중국발(發)이라는 설명이다. 이들은 중국 현지에 마련된 콜센터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전화를 걸어 수신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전화를 받는 입장에서는 발신지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번호가 위장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전화를 걸어도 발신번호를 조작해 국제전화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경찰은 대응에 나섰다. 위장된 번호가 보이스피싱 피해를 확산시킨다고 보고 이번달 1일부터 수신자가 해외에서 걸려온 위장전화를 식별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위장번호가 '02-123-4567'로 설정됐다면 앞에 001, 002, 005, 006, 008 등 국제전화 식별번호가 나타나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되면 '02-123-4567'로 설정된 위장번호는 수신자 핸드폰에 '001-02-123-4567'로 표시된다.
앞에 세자리는 국제전화 표시지만, 그 뒤로 눈에 익은 국내 전화번호가 뜬다면 그 전화는 받지 않는 것이 좋다. 십중팔구 보이스피싱이다.
대부분의 보이스피싱 전화가 중국에서 걸려온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경찰이 집계한 '전화금융사기 월별 발생현황'을 보면 지난 2006년 6월 이후 3년동안 연초 특정한 달에 보이스피싱 발생건수가 일시적으로 급감한 것을 알 수 있다.
<자료=경찰청>
지난 2007년 1월에 신고된 보이스피싱 사건은 708건. 그러나 2월에는 120건이 접수되며 한달 만에 80% 이상 감소했다. 2008년의 경우 1월 신고건수는 595건이었지만, 역시 2월에는 절반 수준인 283건에 그쳤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좀 다르다. 1월 신고건수는 402건이었지만, 2월에 902건이 접수되며 오히려 두배 이상 늘었다.
이유는 따로 있다. 이른바 '춘절(春節)효과'다. 춘절은 중국의 3대 명절 중 하나로 한국의 음력설과 날짜가 같다. 2007년과 2008년, 중국은 2월에 춘절을 맞았다. 반면 올해 춘절은 1월이었다. 중국이 보이스피싱의 온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낚시꾼'도 명절에는 쉰다.
◇ 모든 것은 '5분' 안에 결정된다
이미 돈을 입금했다면 다른 선택은 없다. 재빨리 은행측에 지급정지를 요청해야 한다. 하지만 사기범의 치밀한 행각 앞에서 피해자는 언제나 한발 늦기 일쑤다.
민주당 박선숙 의원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007년부터 올 3월까지 은행권에 접수된 지급정지 요청건수는 모두 2만7203건. 금액으로는 1504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이중 지급정지 요청에 막혀 사기범이 인출하지 못한 금액은 100억원에 불과하다. 즉각 대처하지 않으면 생떼 같은 돈을 다시는 만질 수 없다.
지급정지 요청으로 현금인출을 막았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부당이득 반환소송'이라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사기범의 대포계좌에 들어간 내 돈을 찾는 데도 소송이 필요하다.
부당이득 반환소송을 제기하려면 먼저 피의자를 특정해야 한다. 사기범의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기범이라도 은행측이 현행법을 어겨가며 함부로 정보를 건네줄 수는 없다. 법원의 영장이 필요하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소송에서 반환까지 대략 6개월이 걸린다.
소송을 제기해가며 돈을 되찾아오는 게 현실적으로 이득인지도 불분명하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지원을 감안하더라도, 변호사 선임 등 각종 법률비용이 사기범의 대포계좌에 묶인 금액을 넘어선다면 굳이 시간을 들여가며 소송을 제기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전체 100억원에 이르는 지급정지 계좌잔액 중 피해자가 소송을 통해 돌려받은 금액은 49억원에 불과하다.
김태호 금감원 서민금융지원실 수석조사역은 "소송을 제기하려면 시간과 비용 등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며 "이같은 어려움으로 돈을 되찾는 비율이 절반에 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법작업에 착수했다. 민주당 박선숙 의원은 지난해 12월 '보이스피싱 피해보전금 지급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이 법안에는 사기범에게 속아 돈을 이체한 피해자가 해당 계좌에 대한 지급정지를 요청하면 은행이 즉시 거래정지 조치를 취해야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어 예금보험공사가 금융기관으로부터 관련 자료를 넘겨받아 2개월간 소멸수속 개시공고를 한 뒤 다시 2개월 뒤 피해자가 피해보전금 지급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피해자 구제 절차를 간소화하고 시간을 단축해 보다 쉽게 돈을 되돌려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다.
그러나 법안은 아직 정무위원회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발의된 지 5개월이 넘었지만 은행법, 미디어 관련법 등 이른바 '쟁점법안'에 밀려 주목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박선숙 의원실의 이상원 비서관은 "법안이 아직 '1차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며 "이번 특별법이 조속히 통과돼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법률적인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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