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16일 오후 인터뷰가 시작되기에 앞서 사진촬영을 먼저 진행하고 있는 이정재를 '감상'했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 긴장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편안한 자세에서 기품 있는 40대로서의 매력이 한껏 드러났다. '가만히 있어도 화보'라는 말을 눈앞에서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정재의 멋스러움은 이후 인터뷰에서도 이어졌다. 화면에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신사다운 이미지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진중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속내를 전했다.
이정재는 영화 <암살>에서 그 '멋'을 버리고 신념을 버린 악인 염석진을 소화했다. 특유의 아름다운 미소를 차가운 표정의 가면으로 덮어버린 이정재가 나온 영화를 본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정재 필모그래피 중 역대 최고의 연기라는 극찬이 이어지고 있다.
◇배우 이정재가 <암살>에서 염석진을 맡아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 사진/쇼박스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는 겁이 났었다. 염석진이 보여줘야 하는 스펙트럼이 너무 넓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얼굴을 보여줘야 하는데 제대로 소화할 자신이 없었다"고 말한 이정재는 "나를 선택해준 최동훈 감독의 마음에 그저 잘 연기하는 모습으로 보답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40대 중반에 접어들었음에도 <하녀> 이후 <신세계>, <관상>, <도둑들> 등을 통해 계속해서 연기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이정재가 어떤 마음으로 염석진에게 다가갔는지 궁금했다.
"저 자체도 염석진과 같은 사람이 싫은데,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 쉽지 않았어요. 보여줄 게 너무 많기도 하기 때문에 겁이 났던거죠."
이정재가 맡은 염석진은 혼란스러웠던 일제강점기 때 목숨 때문에 신념을 버린 인물이다. 그 시대의 변절자가 기존 친일파보다 더 악랄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염석진은 영화 속 그 누구보다 악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와 동시에 염석진은 내면의 폭이 넓어 다양한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포기할 수 없었다. 오롯이 캐릭터와 연기에만 전념하며 염석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염석진의 가장 근본적인 면은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는 점이에요. 그 시대에 독립군만 있었던 것은 아니잖아요. 변절한 사람도 있었고, 그 전에 이미 나라를 파는데 동참한 사람들도 있었고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던 시절이에요. <암살>의 염석진은 그들 중 한 명을 그린 거고요.”
◇배우 이정재가 <암살>에서 변절자 염석진 역을 맡아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 사진/쇼박스
염석진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실제로 존재 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캐릭터에 임했다는 게 이정재의 설명이다. 모든 일을 혼자서만 처리해야 하는 인물이었고, 공통된 목표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외롭기도 했다고 한다.
"외로움이 조금 있었어요. 그 감정이 연기를 방해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현장에서 종종 외로움을 느꼈어요. 아마 염석진도 외로웠고, 고독했을 거라 생각해요."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절, 친일을 택하지 않는 것과 독립군으로 나서는 것 모두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터다.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던 곳이 대한민국이었기 때문이다.
염석진을 연기하다 보면 아무래도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올랐을 법하다. 이정재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정재는 이와 관련해 재치있는 답변을 내놓으며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만약 내가 염석진과 같은 상황을 맞았다면'이란 질문을 해봤죠. 감히 그 상황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쉽게 얘기할 수도 있다고 봐요. 저는 그 상황이 온다해도 독립군이 되겠습니다(웃음)."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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