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민족 시인' 윤동주가 쓴 시 '쉽게 씌어진 시'의 일부다. 일제의 핍박이 잔혹했던 일제강점기 시인 윤동주는 행동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그런 자신에 대한 참회와 반성, 부끄러움을 시에 담았다. 윤동주는 자신의 뉘우침을 시에 담았고, 다른 문학인들처럼 변절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역사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삶 속에 적극적인 저항은 없었다. 행동하지 못한 양심은 계속 꿈틀거리며 그를 괴롭혔다.
중국 길림성의 명동천, 윤동주와 같은 집에서 석 달 먼저 태어난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친구다. 문학을 사랑한 윤동주보다도 빨리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당선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평생을 윤동주와 함께 하면서도 송몽규는 몸소 일제에 저항했다. 1943년 7월 10일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 주동자의 혐의로 검거된 인물이다. 비록 윤동주처럼 후세에 널리 기억되지는 못했지만 과정이 누구보다 아름다운, '행동한 양심'이었다.
영화 '동주' 메인포스터. 사진/메가박스 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의 열한 번째 영화 '동주'는 비슷한 시기에 양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밟았고, 서로 다른 결과를 낳은 두 인물을 다룬다. 영화 '배우는 배우다'의 신연식 감독이 이준익 감독과 함께 집필했다. tvN '미생' 등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 배우 강하늘이 윤동주를, '저예산 영화계의 송강호'라 불리는 배우 박정민이 송몽규로 분한다.
영화는 1930년 윤동주와 송몽규의 젊은 청년 시절부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제의 마루타로 생을 마감하던 순간까지를 그린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본 경찰이 윤동주를 취조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취조가 마무리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송몽규를 비난하는 경찰의 질문에 답을 하는 윤동주의 모습에서 출발해 두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발자취를 따라가는 과정에 중간중간 삽입되는 윤동주의 시 13편은 영화의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한다. 영화가 막바지에 달할 때 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완성된다.
영화는 윤동주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살아온 과정이 달랐던 두 사람을 대비시킨다. 감수성이 탁월했던 윤동주는 시대의 아픔을 시로 표현하고, 저항정신이 투철했던 송몽규는 산문을 쓴다.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꾸준히 한 윤동주와 반대로 송몽규는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한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만나며 문학인으로서의 자신을 연마하지만, 송몽규는 일제와 싸울 방법을 강구한다. 같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 때도 윤동주는 문학에 빠져드는 데 반해 송몽규는 유학생들을 모아 일제에 저항하려고 시도한다.
영화 '동주' 스틸컷. 사진/메가박스 플러스엠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강한 울림을 준다. 저항에 실패한 송몽규의 눈물과 저항을 시도하지도 못한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송몽규처럼 잊혀져간 독립군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영화 '암살'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 행동하는 양심과 행동하지 못한 양심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작금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강하늘과 박정민의 연기는 흠 잡을 곳 없다. 강하늘은 매사 차분하고 반듯한 이미지를 지닌 윤동주의 외면과 저항하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부끄러워하는 내면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시를 직접 낭송한 그의 음색도 영화와 상당히 잘 어울린다. 박정민은 송몽규의 터프한 기개를 대사, 표정 모두에 담는다. 촬영 전 사비를 들여 연변의 송몽규 묘소에 다녀올 정도였던 그의 열정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두 사람은 윤동주와 송몽규 그 자체였다.
영화 '동주' 스틸컷. 사진/메가박스 플러스엠
역사적인 인물을 다루지만 순제작비는 단 5억이다. 윤동주를 다루면서 흥행에 실패하면 너무 부끄러워질 것만 같았다는 이준익 감독의 의견 때문이다. 작품 내에서는 중국의 명동천, 경성의 연희전문학교, 일본 교토와 도쿄 등 다양한 공간이 등장하지만 배우나 제작진이나 제작을 위해 비행기를 타지는 않았다. 강하늘과 박정민을 제외하고는 이름이 떠오르는 배우가 없다. 관객들이 아무도 모르는 배우들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이 감독의 의도가 담겨 있다. 비록 유명세는 없지만 연기적인 면에서 어느 누구 하나 빈틈이 없다.
총 19회 차, 약 한 달 만에 촬영을 마쳤고, 모든 장면을 흑백으로 처리했다. 흑백영화를 본다는 신선함도 좋지만, 인물에 더 집중하고 상상력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이준익 감독에 따르면 '동주'는 70%의 팩트와 30%의 허구로 구성됐다. 고증과 취재에 최선을 다한 제작진은 허구마저도 개연성을 높이려고 했다. 영화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지만, 역사 공부를 한다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다. 문학시간, 많은 학생들과 함께 하기에 이만한 영화도 없을 것 같다.
개봉은 2월 18일, 상영시간은 110분이다.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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