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TV 드라마가 온 국민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수요일과 목요일 밤이면 TV 앞으로 마치 자석처럼 시청자들을 빨아들이고, 스마트폰 다시보기 열풍까지 불러오고 있다. ‘태양의 후예’는 ‘중기않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지상파 시청률이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한 상황에서 30% 대를 넘나드는 시청률로 국민들의 마음을 붙들고 있다. 한국을 넘어 중국을 건너 ‘태후 바람’은 멀리 중동까지 뻗칠 기세다. 무엇이 이 드라마에 이토록 열광하게 만들까.
굳이 비꼬아 말하자면 요즘 우리 국민들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정치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을 다 가지고 있다. 송중기가 열연 중인 유시진 대위는 인간의 가장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 타인에 대한 배려심,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애절함 등 보는 이들의 마음을 뛰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송혜교가 배역을 맡은 의사 강모연은 사회지도층 위치에 있으면서도 기득권을 고집하거나 자기중심적인 삶보다는 의사 본연의 사명감이 극적으로 돋보인다. 가상의 지역인 우크르를 수호하는 장병들의 눈빛에는 진정성과 인류애가 절절하다. 아무리 가상의 드라마라 할지라도 우리가 잊고 있던 그 감정과 감성을 고스란히 뽑아내며 드라마에 빠져들게 만든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태양의 후예보다 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국회의원 선거전에서 더 많은 기쁨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전국 253개 지역구에서 수백명의 등장 인물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섰지만 어느 한 지역구에서도 감동의 드라마나 감성적 공감대를 찾기 힘들다.
19대 국회가 전국민적인 비판을 받으며 고꾸라졌을 때에도 20대 국회만큼은 더 나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국민들이 다음 국회에 거는 기대는 간단하지 않다. 산적한 국가적 과제가 쌓여있고 남북 긴장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선거전에 뛰어든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그러한 국민들의 기대치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미지수다.
착한 선거의 시작은 좋은 후보자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첫 단추부터 잘 못 채워져 버렸다. 각 당의 공천은 막장드라마를 연상시켰고 그 결과도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리서치앤리서치가 동아일보의 의뢰를 받아 지난달 29~30일 실시한 조사(전국 만19세 이상 1000명, 유무선RDD전화조사, 표본오차95%신뢰수준±3.1%P, 응답률 11.4%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 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공천을 잘한 정당이 어디인지 물어본 결과, 잘 한 정당이 없다는 의견이 절반에 육박하는 47.7%였다. 박수를 받고 정당의 지지율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어야 할 공천이 '흥행 쪽박' 된 결과다.
공천 과정 내내 유권자들은 눈살을 찌푸렸고 실망감은 극도로 켜졌다. 유력 국회의원이 당대표를 향한 막말로 탈당했지만 무소속으로 출마를 선언하고, 한 정당의 대표가 자기 몫의 비례대표 자리 욕심으로 몽니를 부리는 과정에서 공천 시청률은 급전직하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같은 조사에서 국회의원의 가장 중요한 자격 및 덕목을 물어본 결과 도덕성이 46.1%로 절반 가까웠다. 그 다음은 경제적 식견과 능력이었고, 확고한 국가관과 안보 의식, 그리고 품격 있는 언어 구사 능력이 그 다음이었다. 과연 공천된 후보자들을 볼 때 자격 요건을 갖춘 인물이 몇 명이나 될까.
불과 십수년전만 해도 아시아 시장을 평정한 드라마와 영화는 일본 작품들이었다. 홍콩 영화였다. 지난 짧은 시간 동안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아시아 시장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간 데에는 철저한 자기 반성의 결과였다. 식상한 주제를 뒤로하고 제작의 완성도를 급속도로 끌어 올렸다. 냉정한 시장에서 혹독한 평가를 받으며 성장을 거듭해왔다. 결국 ‘태양의 후예’라는 대박행진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정치와 국회는 어떤 냉혹한 평가와 자기 반성을 했는가. 지난 수십년간 한국 국회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진정 자기 희생적이며 국민 친화적 행보를 한 이가 고작해야 ‘빈민의 아버지’였던 고 제정구 전 의원 정도만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지나친 자조일까. 한 대기업 수장이 대한민국 정치를 비판한 발언에 대해 자존심을 가지고 대들었던 수많은 정치인들이 지금도 그들의 주장에 얼마나 명분을 찾을 수 있을까. 적어도 다음 선거에서는 막장 드라마 같은 공천 파장이나 범법 기록으로 점철된 후보들이 나서는 선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후’의 유시진 대위(송중기 분)가 이런 선거를 보았다면 아마도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상한 선거이지 말입니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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