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영화 '올드보이'의 근친상간을 비롯해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 매 작품마다 파격적인 장면과 소재를 스크린에 채운 박찬욱 감독이 신작 '아가씨'를 들고 나왔다. 이번에는 동생애를 소재로 차용했다. 국내에서 개봉하기 전 칸 국제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초청돼 벌칸상을 수상하는 등 기대와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약 300백만 이상의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 개봉 후 "역시 미장센의 박찬욱", "영화의 의미가 뭐냐", "베드신이 야하지 않다" 등 다양한 의견이 온오프라인에서 충돌하고 있다. 박 감독의 '아가씨'가 스토리뿐 아니라 연출적인 면에서도 색다른 데다 여러가지 상징까지 저변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 사이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박찬욱 감독을 최근 삼청동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박 감독은 영화 속 상징적 장면과 그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놨다.
박찬욱 감독. 사진/CJ엔터테인먼트
평범한 대화신에서의 롱테이크
칸 영화제의 총아로도 불리는 그는 '깐느 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영화제의 초청은 그만큼 영화가 특색이 있다는 얘기다. 이번에도 박 감독만의 특색이 잔뜩 묻어있다. 여러가지 중 눈에 띄는 건 평범한 대화신에서의 롱테이크가 여럿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초반부 한글을 읽지 못하는 하녀 숙희(김태리 분)와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는 히데코(김민희 분)의 대화신은 내용과 별개로 화려하다. 이 신에서 카메라는 김태리가 읽는 편지를 클로즈업하다 뒤로 빠지며 풀샷을 잡더니 이내 김민희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한다. 그러면서 김태리가 김민희를 따라 침실 문을 넘어 들어오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이 장면은 영화 내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 아님에도 화려하게 표현된다.
이 장면뿐 아니라 백작(하정우 분)과 히데코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숙희가 멀리서 다가와 창 밖에서 쳐다보는 장면, 냉면 식사 중 코우즈키(조진웅 분)가 전화를 받으러 가는 장면 역시 일반 대화신과는 사뭇 다르다.
"영화 속에서 감정이 분출되거나 액션이 있다거나 그런 신이 아닐 때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특히 앉아서 얘기를 하는 장면이 그렇다. 물론 쉽게 찍으려면 쉽게 찍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보던 거랑 똑같은 거다. 감독의 개성은 그런 쉬운 장면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실 그런 장면을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신경 쓴 건 아니다. 클라이막스든 아니든 1분, 1초가 모두 소중하다. 제일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 고민해서 차용한 거다. 대본을 보면 신마다 저마다의 요구가 있다. 감독은 항상 각본에 귀를 기울여서 거기에 가장 어울리는 형식을 찾아낸다. 그게 감독이 할 일이다. 그리고 감독들은 다 안다. 대화신이 가장 어렵다는 걸."
"소위 먹물의 천박함 비웃고 싶었다"
'아가씨'는 두 여성의 동성애를 그리면서, 세 사람의 물고 물리는 거짓말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감독이 짜놓은 판 안에서 거짓말의 진실을 쫓고 난 뒤에는 "귀족의 천박함에 대한 풍자"가 머릿 속에 맴돈다.
영화는 돈이 많은 귀족들을 불러놓고 야한 소설이나 다름없는 책들을 히데코를 통해 낭독시키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코우즈키를 비웃는 듯하다. 어쩌면 '아가씨'를 통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코우즈키로 대변되는 인간들의 천박함을 풍자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코우즈키는 열등감이 팽배한 사람이다.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 일본을 숭배한다. 내면이 허약한 사람은 힘을 숭배하기 마련이다. 코우즈키 역시 내면이 허약한 나머지 제국주의를 숭배하게 된 거다. 자기 민족은 멸시하면서 말이다. 배운 건 있어서 책을 수집하는데 죄다 야한 소설이다. 그걸 또 마치 고상한 취미라도 되는냥 어깨에 힘을 준다. 아주 천박하고 참 웃기는 짓거리 아닌가. 그걸 파고드는 게 백작이다. 하정우가 조진웅을 멸시하는 표정은 기가 막히다. 은근히 미묘하게 풍긴다. 코우즈키를 통해서 소위 먹물이라는 사람들 중 속물근성과 위선, 또 노예 근성이 있는 그런 사람들을 시원하게 비웃어보고 싶었다."
"숙희와 히데코, 임자 만난 거죠"
'아가씨'가 개봉된 뒤 일각에서는 남성의 편협한 시선으로 여성을 멸시했다는 비판을 했다. 그 비판의 핵심 이유는 숙희가 히데코를 사랑하는 데 있어 아무런 성찰이 없다는 것이다. 히데코의 경우 코우즈키의 행위로 인해 남자에 대한 거부감으로 점철됐을 거라 해석할 수 있지만, 숙희는 이러한 해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임자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사실 고민하는 장면을 더 찍긴 했는데, 그게 개인의 성찰은 아니었다. 자기 임무 사이에서의 고민이었다. 히데코를 속여야 하는데, 히데코가 점점 인간적으로 좋아지는 상황에서의 죄의식과 같은 고민이다. 둘은 '임자' 만난 거라 생각한다. 또 일종의 자신을 속이는 행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베드신을 하는 장면을 보면 히데코가 '남자들이 원하는 게 뭐냐'라면서 시작한다. 그걸 숙희가 가르쳐준다. 숙희의 입장에서 그 장면을 보면 가공의 남자를 만들어 임무를 완수해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렇기에는 너무 나가버리는 건 있다. 사실 어느 정도 하다 끝내야 하는데 완전히 다 해버리지 않나. 숙희의 행동은 일종의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임무의 일환이라고 여기면서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숙희는 초반에 백작이 찾아와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미 어느 정도 그런 성향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박찬욱 감독. 사진/CJ엔터테인먼트
"백작은 히데코를 사랑했다"
극 중에서 늘 여성에게 사랑 받아온 백작은 자신이 유일하게 유혹할 수 없는 여성이 히데코라고 말한다. 그래서 히데코에게 일종의 제안을 하고 히데코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두 사람의 거래가 보기 좋게 성공한 뒤 백작은 히데코에게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새롭게 살아보자"며 새로운 제안을 한다. 하지만 그 질문이 진심이 다한 프로포즈인지 단 한 번의 잠자리를 원하는 '작업'인지 명확하지 않다. 박 감독은 백작이 히데코를 사랑했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난 백작이 히데코에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여자끼리 좋아한다는 걸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법도 한데, 히데코한테 눈이 멀어서 그걸 놓친 거다. 백작의 입장에서 보면 그간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는 이제껏 모두 자신의 여자가 됐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건 상상 밖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도 캐치하지 못했다. 그리고 편집한 분량이 있다. 백작이 '내가 진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믿지 않더라. 거짓말을 하면 믿는데'라는 뉘앙스가 포함된 대사다. 그러면서 '아가씨를 약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때요? 믿어지나요?'라는 대사가 있다. 이게 믿으라는 얘기인지 아닌지 애매하지 않나. 백작 입으로 열렬히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에는 오글거리고, 자존심도 상할 수 있다. 여자가 다가왔지 자기가 다가간 적은 별로 없었을 놈이다. 그런 그가 블라디보스톡에 가자고 했으면 많이 베풀어준 거다. 그런 점에서 백작은 히데코를 사랑했다고 본다."
"막판 방울 베드신, 꼭 필요했다."
'아가씨' 내에서 논란이 되는 장면은 후반부 히데코와 숙희의 방울 베드신이다. 베드신에서 두 사람이 사용한 방울은 어릴 적 코우즈키가 히데코가 잘못했을 때 때리는 데 사용한 방울과 흡사하게 생겼으며, 낭독회에서 히데코가 직접 읽은 소설 속 여성이 자신에게 사용한 것과 같다. 다소 음란해보이기도 하는 이 장면에 대해 제작사 내부에서도 반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 감독은 이 장면이 꼭 필요했다고 밝혔다.
"방울이 히데코에게 있어 물리적인 학대 도구면서 독회에서 비춰지는 것으로 보면 정신적인 학대 도구이기도 하다. 이게 마지막에 등장한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히데코가 이걸 사랑하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게 말이 되냐는 지적이 많았다. 나는 방울이 학대도구였기 때문에 필요했다. 그렇게 괴롭혔던 방울을 즐기려고 사용하는 히데코는 어떤 트라우마를 극복한 거다. 방울을 통해 상황이 역전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박찬욱 감독. 사진/CJ엔터테인먼트
"히데코가 행복했으면 했다"
지난 5월 영화의 첫 홍보를 알리는 제작보고회가 있었다. 이날 박 감독은 '아가씨'를 두고 명쾌한 해피엔딩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아가씨'는 명쾌한 헤피엔딩이다. 기존의 박 감독의 작품의 색깔과 사뭇 다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스포일러를 서슴없이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박 감독의 속내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그저 솔직하게 펼쳐놓은 것뿐이다. 재밌는 점은 정확한 스포일러인데, 아무도 믿지 않더라. 걱정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마치 하정우의 삭제된 대사와 같았다. '이번 영화는 헤피엔딩입니다. 어때요. 믿어지나요?'라는 느낌이다."
매 작품마다 비극을 다뤄온 박 감독은 자신의 말대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했다. 다소 어울리지 않아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왜 그는 해피엔딩을 설정했을까.
"소설을 읽을 때 히데코가 행복했으면 했다. 행복하게 퇴장시키고 싶었다. 영화에서 보면 숙희랑 잘돼야 히데코가 행복하다. 또 코우즈키와 백작은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보니까 단순한 권선징악형 해피엔딩이 됐다. 막상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해피엔딩을 만드니까 나도 행복해지고 약간 여기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밝고 행복한 영화만 찍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더라. 그래도 비극이 필요하거나 추한 장면이 필요하면 아마 찍을 거다. 하하."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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