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의 한 사진에는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수상한 손기정·남승룡 선수가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손기정 선수는 우승 기념 부상인 묘목으로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기미가요’가 연주되고 일장기가 게양되는 순간은 식민지 청년들의 승리의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후일 남승룡 선수는 손 선수의 우승보다 그가 묘목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던 것이 더 부러웠다고 고백했다. 근래 공개된 또 다른 사진에도 오른손과 팔에 운동복을 말아 쥐어 유니폼의 일장기를 가린 채 트랙을 달려 나가는 손기정 선수의 모습이 있다. 이후 벌어진 언론의 ‘일장기 말소사건’은 선수들과 조선 동포 모두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지난 2012년 '대한민국 우표전시회'에 전시된 손기정 선수의 우표와 유품. 사진/뉴시스
‘일장기 말소’의 언론 정신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남승룡 선수가 1등, 3등으로 우승을 한 소식이 국내의 신문사들에 의해 보도될 때, 두 개의 신문이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의 운동복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내보냈다. <조선중앙일보>의 8월13일자 보도, 그리고 같은 날짜 <동아일보> 지방판과 8월25일자 보도가 그것으로, 당시 파란을 일으킨 일명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조선중앙일보의 보도 때는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이라 판단”(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극비-조선출판경찰개요’, 1936)한 조선총독부가 사진을 검열에서 통과시켰으나, 동아일보의 8월25일자 보도 때는 이 일이 적발되어 여러 기자들이 연행되었다. 특히 사진 수정을 제안했던 이길용 기자를 비롯한 5인은 40일 동안 구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강제로 언론계를 떠나게 된다.
무기 정간을 당한 동아일보는 많은 이들이 해고된 후 1937년 6월3일 속간되었다. 한편, 항일운동가가 다수 포진해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근신의 의미로 자진 휴간했으나, 총독부에 의해 여운형이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주주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는 등 갈등을 겪다가 마침내 1937년 11월5일 발행 허가의 효력 상실로 폐간되고 말았다. 후일 발굴된 이길용 기자의 회고록(<신문기자 수첩> 내, 모던출판사 1948년 발행)은 사시(社是) 혹은 전통처럼 사내(社內)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고 증언하면서 당시 일장기 말소가 “부지기수”였음을 밝히고 있다. <만인보>에는 사건 당시 동아일보 미술담당기자로 일장기를 지운―일제 말 친일 행적을 남기긴 했으나―이상범 화백에 대한 시를 찾아볼 수 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은 눈도 껌벅껌벅 크지만
입술이 두툼한 문풍지였고
입이 열리면
막술 들이켜기 좋고
토하기 좋았다
의재 허백련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과 더불어 근대 4대 산수화백
1936년 히틀러체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주에서
조선청년 손기정이 우승하자
그의 가슴팍 일본 히노마루를 지웠다
동아일보 미술부 기자 시절
그는 감옥 가고
신문은 폐간
그의 그림과는 달리
가난과 야인 노릇으로 늙어갔다
그러다가 자유당정권 국무위원들이 청해서
이승만 탄신 축하 그림
새벽 하늘 기쁜 소식(曉天報喜)의 화제로
< … >
옛 성터
옛 기와집
그 지붕 위의 까치
그리고 부지런한 농부와 염소 한두 마리
소위 10월유신 그해
1972년 그는 세상 떠났다
사람이 그림이었다
(‘청전 이상범’, 13권)
“4월혁명의 신문 민족일보”, 박정희 쿠데타에 쓰러지다
나라 잃은 시절 일장기를 지워가며 민족정신을 고취한 언론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탄압받았으나, 나라를 되찾은 시절 분단된 조국이 안타까워 신문의 제호마저 ‘민족일보’로 정하고 ‘평화통일’을 주창하던 언론인은 같은 민족·동포인 쿠데타 세력의 수장에 의해 처형되었다. 박정희의 지시로 사법살인을 당해 만 31년의 짧은 삶을 마감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1930-1961)가 바로 그 인물이다.
혁명의 시대 열려다
반동의 시대에 막혔다
터무니없었다
살아온 것 갑절 더 살아야
그 자신의 포부의 절반
이루었을까
말았을까
조용수
4월혁명을 너무 믿었다
1961년 5월 20일
박정희 쿠데타 이후
< … >
2천14명을 감옥에 넣어버렸다
5월 21일
사회 각계인사 2천여명 추가로 넣어버렸다
감옥 초만원
그로부터 대한민국 국시(國是)는 반공
서대문형무소 비둘기들이 우르르 날아올랐다
4월혁명의 신문 민족일보
젊은 발행인 조용수와
간부 12명도 넣어버렸다
사형선고
터무니없었다
< … >
조용수
그는 살아온 길보다
살아갈 길 아득히 남겨두고
흙으로 돌아갔다
터무니없었다
(‘조용수’, 22권)
진주(옛 진양군 대곡면) 태생인 조용수는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에 편입했다. 그 후 한국거류민단 중앙총본부 차장으로 활동했는데, 민단 기관지 <민주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언론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1959년 민단 내 주요 인사들과 함께 '조봉암 구명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민단 지도부에 의해 지역 지부로 좌천되기도 했지만―조봉암은 1958년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혐의를 받고 1959년 사법살인을 당했다―다른 한편, 조총련의 재일한국인 북송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귀국한 그는 혁신계 정당인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혁신계를 통합·대변하기 위해 다른 진보인사들과 함께 <민족일보>를 창간한다. 1961년 2월13일 창간호를 시작해 5월19일 지령(紙齡) 92호를 끝으로 5월27일 폐간된 이 일간지의 사시(社是)는 ‘민족일보’라는 제호 옆, 1면의 좌측상단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한국 언론사에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진보적인 기치를 내건 국민 대중의 신문이 있었던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씨가 5·16 군사 쿠데타 미화를 비판하며 사형 당한 자신의 형에 대한 억울함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민족일보의 탄압과 조용수 사법살인의 이유
민족일보는, 독립운동가와 ‘근로대중’ 등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 자주적인 민족의식과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성향으로 인해, 창간 한 달 만에 3만5000의 발행 부수를 기록하고 가두판매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민들의 인기를 끌게 된다. 그러나 비자주적이고 예속적인―미국이 원조사업에 대한 자신의 감독과 감시를 요구했던―‘한미경제협정’을 비판한 점, 외세의 간섭 없이 북한과 협상해 우리 민족 스스로 자주적인 평화통일,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중립화 통일을 주장한 점 등은 정권과의 갈등을 낳았다. 사실 민족일보는 창간되기도 전에 이미 여당 의원에 의해 창간자금에 대한 조총련 지원 의혹이 제기되었고,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혁명재판’의 빌미가 되었다. 또한 미국의 압박으로 장면 정권이 발표한 이른바 ‘2대 악법’으로 불린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의 제정 방침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61년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장
< … >
사형수 조용수의 유언을 듣고 있다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게
억울하다 정규근 동지에게 돈 꾸어다
신문 만드는 데 썼는데 갚지 못하고
가게 되어 미안하다
덜커덕
밑바닥이 내려앉았다
사형수의 몸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5분이 지나갔다
사형수의 목이 축 늘어졌다
서른두살 조용수의 삶 끝났다
일본 조총련 공작금
1억환 불법도입
북한괴뢰집단을 위한
언론 활약을 했다는 죄목
억지 조작
이제 막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물 타려고
미국에 보인
반공 조작
< … >
4월혁명과 함께
민족일보 창간
그의 주장은
남한이 반공에 성공하려면
스웨덴과 같은
민주사회주의 채택하여
북한보다 더
대중을 위하는 것이 첩경이다
이승만 자유당식
반공으로는 안된다
그의 논설은
북한체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서른두살 조용수의 삶 끝났다
남한산성 밑
거기 풀덤불
집과 재산 몰수
원통한 가족 원통해할 겨를 없이 거리에 내몰렸다
유난히 눈보라 영각의 겨울
(‘조용수의 마지막’, 23권)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틀 후인 5월18일 조용수를 비롯한 민족일보 관련자 13명을 체포했다. 조용수는 박정희가 한때 남조선로동당 활동을 했던 전력을 고려해 5월17일자 사설에서 그의 ‘군사혁명’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려하기도 하지만, 박정희는 바로 자신의 그 남로당 경력 때문에, 이를 반공으로 상쇄하고 미국에 인정받기 위해, 진보적 통일운동을 지향하던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를 제물로 삼았다.
민족일보 사건으로 구속된 13인 중 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조용수 사장에게만 사형이 집행되었고 다른 2명은 감형·석방·복권되어 이후 공직을 거치고 훈장도 받게 된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조총련의 자금을 건네 준 간첩으로 몰렸던 전 조봉암 비서 이영근마저도 박정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90년 일본에서 사망하자 한국정부가 훈장을 추서했다는 점이다. 이 모두 조용수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반증하니 더욱 비통할 뿐이다. 전략적 이유 때문이겠으나 박정희 정권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에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원칙을 천명한 것을 상기하면 더욱 그러하다. 소수의 기득권층이 아니라 국민의 다수인 ‘근로대중’을 생각하고 평화통일을 염원하던 이 청년언론인과 함께 사형당한 이들이 3.15부정선거의 주범인 전 내무장관, 4·19 당시 발포명령을 내렸던 전 경무대 경호책임자, 이승만의 정치깡패 같은 자들이었다니 통탄할 일이다. 국제신문인협회(IPI), 국제펜클럽(PEN) 등 세계의 언론·인권단체들이 그를 구명하기 위해 항의성명을 낸 사실이―만약 소식이 그에게 전해져 알고 있었다면―“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게 억울”했을 그에게 혹 작은 위로라도 되었을까. 1962년 1월 국제저널리스트협회가 그에게 국제기자상을 추서한 것이, 2008년 1월 마침내 그가 47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 그와 그의 가족이 겪은 고통에 위로가 될 것인가.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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