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에서 골판지 원지 값이 뛰고 있다. 최대 수요국 중 하나인 중국이 환경규제의 일환으로 중소 원지 공장을 폐쇄하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내로 수입되는 원지가격의 오름세가 확연하다.
원지는 골판지상자의 주원자재로, 연말 상자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몸값은 더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고 모든 원지가 환영 받는 것은 아니다. '한국산'이란 단어가 붙으면 원지가격은 오히려 낮아진다. 이는 품질 탓이다.
골판지산업도 기술력이 요구되는 산업분야다. 적은 원자재로 가볍고 탄성력이 높은 제지를 만드는 것이 업계 기술력의 핵심이다. 제지산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국내 원지 품질은 중국보다 월등히 높았다"며 "하지만 점차 품질이 뒤처지더니 이젠 한국 원지는 국제 시장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어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수출 또한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똑같은 무게의 원자재를 사용해도 한국산 원지의 탄성이 중국산 제품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한국제지산업의 현주소다.
근본적인 원인은 산업구조에 있다. 국내 제지산업에서 '시장 경쟁'은 옛말이 됐다. 원지의 경우 메이저 4곳이 이미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경쟁보다 담합이 더 쉬운 구조다. 수직계열화도 산업구조 왜곡에 한 몫하고 있다. 원지, 원단, 상자로 이어지는 산업구조에서 수익계열화는 손쉬운 수익을 보장한다. 메이저 원지사들의 매출 70~80%는 계열사로부터 나오고 있다.
국제시장에서 '한국산=하급'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지난 5년간 국내에서 원지사들은 산업구조 하단에 있는 판지사와 상자제조사들의 밥그릇을 탐내는 데 바빴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약자를 착취하는 ‘총력전’을 수행하는 후진적 행태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무기는 원지다. 지난 8월 인상된 원지 단가는 6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치권에서 문제를 지적하면서 시장 정상화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커졌지만 원지사들의 각성은 없다. 오히려 수급을 조절하며 원지가격 인상에 대한 명분을 만드는 데 여념없다.
독식 행보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타깃은 골판지산업구조 말단에 위치한 상자시장이다. 손쉽게 지배할 수 있는 이 시장을 원지사들은 놓치지 않고 있다. 상자시장에서 이들의 점유율은 30% 가량이다. 약자의 밥그릇을 빼앗는 사이 한국제지산업의 기술력은 뒷걸음을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들로 멍든, 제지산업의 민낯이다.
임효정 중소벤처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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