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광표 기자] 소비자 보호를 위해 이른바 '착한배신'을 표방한 '담합행위 자진신고제'(리니언시)의 실효성을 두고 이해관계 중심에 있는 업계의 볼멘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당초 담합을 근절하기 위해 도입된 이 제도가 시장지배력이 큰 대기업과 '갑'의 위치에 선 기업에게만 면책 사유를 주고, '을'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각지대에 있는 담합을 적발하기 위해 리니언시 제도는 매우 효과적일 수 있지만, 대기업에 과징금 감면 혜택이 집중되는 것도 수년째 해묵은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식품업계 한 관계자는 "담합의 유형을 살펴보면 업계 1, 2위가 이를 조장하고 후발주자인 중소형사가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대기업은 담합으로 이미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방대한 정보망을 통해 공정위가 조사에 들어간다는 첩보까지 입수, 자진신고 해 빠져나가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결국 중소형사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가 과징금 철퇴만 맞는 불공정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담합의 실체적 주동 기업을 면밀히 검증하지 않고 오로지 자진신고 시간순위로 제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담합 적발에 대한 효과 뒤 감춰진 곳에서는 리니언시 제도를 악용하는 기업들의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논란 역시 끊이지 않았다.
삼양식품(003230)의 이른바 '허위 리니언시'로 라면 4개사가 엮였던 라면값 담합 사건이 단적이 예다.
지난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는
농심(004370)과 삼양식품,
오뚜기(007310), 한국야쿠르트 등 라면 4사가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라면값 등을 담합한 혐의로 과징금 1354억원을 부과했다. 시장점유율이 월등한 농심이 가격인상안을 마련해 알려줬다는 게 조사결과였다. 특히 농심에게 부과됐던 1080억원의 과징금은 식품업계에서 역대 최고 수준으로 이 회사의 연간 영업이익을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당시 공정위는 라면 4사의 시장점유율을 합하면 거의 100%에 달해 적발과 처벌에 따른 기대효과가 크다고 자찬까지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삼양식품이 허위로 라면값 담합을 자진신고한 파렴치한 행위가 수면위로 드러나면서 해당 사건은 아예 결과가 뒤집혔다. 농심과 오뚜기, 야쿠르트는 모두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과 함께 2015년 최종 승소했고, 담합의 억울한 누명도 벗게 됐다. 결국 삼양식품이 리니언시를 악용해 허위 신고한 내용만 믿은 공정위가 나머지 라면 3사에 부당하게 과징금을 부과한 셈이 됐고, 공정위는 받은 과징금의 이자까지 더해 이들 업체에게 되돌려줬다.
업계 관계자는 "농심 등 3사가 뒤늦게 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삼양식품의 근거없는 주장에 3년6개월여간 '국민을 상대로 가격을 담합하는 업체'로 오명을 안고 지낸 건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됐다"며 "자진신고와 이에 따른 면죄부에 집중된 제도의 허점이 있는 한 앞으로도 삼양식품과 같은 그릇된 행태로 변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최근 유한킴벌리가 위생용품 담합을 주도하고, 리니언시를 악용해 담합 책임을 영세대리점에 전가시키는 '갑질'로 집중포화를 맞은 가운데 대리점을 끼고 있는 식품업계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유업계의 경우 급식우유 등 공공기관에서 발주받는 제품의 경우 입찰가를 조정한 대리점과의 가격 담합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리니언시 악용' 유혹에 노출돼 있는 실정이다. 이 과정에서 유한킴벌리처럼 본사 영업사원을 통해 대리점을 앞세운 담합을 주도해놓고 제재 움직임이 보이면 '리니언시'로 책임을 대리점에 돌리는 '갑질'이 반복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모든 시장이 기업간 경쟁 개념이 존재하지만 동종업계 안에선 동반자 개념 또한 분명 있다"며 "리니언시 제도의 취지는 알지만 담합 책임이 더 무거운 기업이 100% 면죄부를 받고 '갑' 지위를 가진 기업의 추악한 배신이 넘쳐나는걸 보면 리니언시가 과연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 의문이 생길수밖에 없다"고 성토했다.
한 대형마트에 농심과 오뚜기 라면 제품들이 진열돼 있다. 두 회사는 리니언시 제도를 악용한 삼양식품으로 인해 1000억원대의 과징금 폭탄을 맞은 바 있다. 사진/뉴시스
이광표 기자 pyoyo8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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