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짧은 머리에 검게 탄 피부의 운동부 친구는 들어오는 수업시간마다 잠을 청했다. 책을 베개 삼아 일어날 줄 몰랐지만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이미 운동으로 진로를 정했으므로 공부는 안 해도 된다는 암묵적 동의, 관행이 존재했다.
과거 최우수 선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면 대학교끼리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다. 대학에서 그 선수 고등학교 동기를 몇 명 더 받아주느냐가 당락을 좌우하기도 했다. 친구 덕에 명문 대학에 입학하게 된 동기들은 돈을 냈다. 관행이었다. 운동선수도 소위 상위권 대학에 가야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시대, 학벌 위주의 시기였기에 가능한 얘기다.
최순실씨 측은 지난 15일 이러한 체육계 관행을 언급했다. 대법원이 최씨의 딸 정유라씨 이화여대 입학·학사 비리 혐의에 대해 징역 3년을 확정하자 "우리 사회에 널리 관행적으로 묵인돼 온 예체능 특기생에 대한 입학 등 학사 관리상의 적폐라고 할 수 있는데 최씨만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정씨 말고도 입학·학사 특혜를 받은 사람이 많은데 최씨만 법적 처벌 대상이 됐다는 요지다.
지금은 나아지고 있으나 최씨 말처럼 체육계에서 어느 정도 관행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씨의 승마 지역 대회 준우승 후 심판들이 경찰서에 연행된 일, 정씨가 지원 기간 이후 딴 메달을 목에 걸고 면접장에 나오고 면접위원이 이를 사전에 안 일, 수업 과제를 내지 않아도 교수가 알아서 이를 대신 만든 일 등이 모두 '관행'인가. 관행으로 인식했다면 정씨 사건이 불거진 뒤 총장 사퇴를 외친 이대 학생들의 분노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학생들은 관행이 아닌 학사시스템 근간을 흔든 적폐와 맞서 싸웠다.
'관행'은 최근 국민적 공분을 낳고 있는 강원랜드와 주요 4대 시중은행 등 금융계 채용 비리 의혹에 또 등장한다. 임직원 자녀나 외부 추천 대상으로 이름을 올린 고위 관료나 경영진 조카들이 서류심사나 면접 등에서 합격에 미달하는 점수를 받고도 공채에서 최종 합격했다. 은행 등은 과거부터 있었던 임원추천제로 사람을 뽑은 것이라며 관행이었다고 해명했다. 아연실색할 일이다.
정정당당히 심사에 응한 사람들을 '병풍'으로 만든 게 1차 문제지만, 부정을 하나의 관행으로 포장해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는 데에 국민은 분노한다. '오래전부터 해 오는 대로 함'이란 뜻의 관행은 적폐들의 좋은 핑곗거리다. 핑계 자체가 될 수 없게 해묵은 관행을 걷어내는 일, 지금 시급히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김광연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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