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보면 특별한 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날들이 적혀 있다. 그 중 5월만큼 많은 행사가 적혀 있는 달도 없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부처님오신날, 바다의 날…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별한 날이 너무 많으니 그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더구나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매일 풍족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특별한 날은 이제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지난 세대의 아이들은 어린이날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지금의 아이들도 그럴까. 어버이날은 어떠한가. 과거에는 부모의 희생 앞에 무한한 경의를 표했지만 지금의 아이들도 똑같은 심정으로 이날 부모님을 생각하며 공경할까.
스승의 날은 어떠한가. 한 교사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스승의 날을 폐지하라는 내용의 글을 남겨 씁쓸함을 자아냈다. 그는 “형식에만 치우쳐 정부 포상계획에 따라 포상 대상자를 추천하라는 공문이 학교로 와 교사들은 서로 눈치만 보느라 위화감이 조성되고, 국민권익위원장은 학생 대표가 아니면 카네이션 한 송이도 선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멋대로 유래도 불분명한 스승의 날을 정해 놓고 교사를 선물 바라는 사람으로 만드는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다”며 “교사들도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는 것을 반긴다”고 밝혔다. 형식과 편견에 사로잡힌 ‘스승의 날’은 교사의 어깨만 짓누르고 오히려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것이 골자다.
프랑스에도 특별한 날들이 있다. 지난 17일은 <아버지의 날>이었다. 각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노고를 치하하며 축하파티를 열었다. 전통적으로 이 날은 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린다. 먼저 아버지의 날 기념으로 빨간 장미를 드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하얀 장미를 들고 성묘를 간다.
이 날 프랑스 언론들은 아버지의 날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들을 재조명해 특별한 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일간지 <르 피가로>는 아버지라는 단어인 페르(pere)의 기원과 역사를 특집으로 다뤘다. <르 피가로>에 따르면 페르는 중세의 무훈시인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 1100년)에 등장하는 페르 신(Perre)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지금의 철자인 Pere로 간단히 고정된 것은 12세기다. 그 당시 아버지 신은 고전적 라틴어로 기독교적 의미인 파테르(Pater,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말)와 직결되어 있었고 이는 아이를 낳는 사람, 창시자, 늙은 남자를 가리켰다. 1380년에는 가족대표 또는 세대주를 의미했으나 1470년 가족의 아버지라는 의미가 되었다. 1690년 사전편찬자인 퓌르티에르(Furetiere)는 “페르(아버지)”에 대한 논문 작성에 전념했다. 17세기 사전학자인 세자르 드 로슈포르(Cesar de Rochefort)는 “아버지(pere)라는 타이틀은 인간이 간직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영광스런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세속적 의미에서 아버지의 날 행사는 20세기 들어 시작되었다. 1910년 6월 미국의 한 여교사가 어머니 사후 6명의 자녀를 혼자 키운 아버지를 기린 것이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 기념일이 프랑스에서 공식화된 것은 1952년이다. 1949년 브르타뉴의 유명한 라이터 회사 플라미네르(Flaminaire)가 상업적 이유에서 아버지의 날을 제창하고 나섰다. “어머니의 날(1928년 제정)은 있는데 왜 아버지의 날은 없는가!” 1950년 플라미네르의 디렉터 마르셀 케르시아(Marcel Quercia)는 가스라이터 판매 촉진을 위해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그는 미국모델을 본떠 6월 셋째 주를 아버지의 날로 정하고 “우리 아버지들은 아버지의 날 플라미네르를 갖고 싶어한다”라는 슬로건으로 소비자를 공략했다. 결과는 가히 성공적이었다. 그 당시는 많은 남자들이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오베르튀르(Oberthur) 인쇄사에서 신년달력에 ‘아버지의 날’을 기입했다. “처음에 국가에서는 이 기념일의 상업적 유래를 못 마땅해 했다. 그러나 1952년부터 공식화했다”고 작가인 자크 르노(Jacques Renaud)는 웨스트 프랑스(Ouest France)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때 장한 아버지 상을 수여하기 위해 위원회도 발족했다.
이처럼 특별한 날은 나름 특별한 의미와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긴 역사 속에서 세대가 바뀌고 사회문화가 바뀌면서 특별한 날의 의미가 변질될 수 있다. 스승의 날을 폐지해 달라는 교사의 슬픈 청원이 바로 그 예다.
이런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날을 남발하고 물질화하기보다 그날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 전통으로 이어가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카네이션 한 송이를 스승에게 달아드리는데도 학생 대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이 우스꽝스런 현실. 스승의 날의 유래와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닐까.
한국 사회는 뭔가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다. 우리 사회에 전통이 사라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와 언론은 달력에 적혀있는 뜻 깊은 날들의 유래와 역사를 이제라도 조명하여 전통으로 보존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통적 자산은 또 하나의 국력이기 때문이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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