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공동취재단, 뉴스토마토 이성휘 기자]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주춤했던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한반도 운전자론이 다시금 주목받는 모습이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20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마련된 프레스센터 브리핑에서 “70년 만에 전쟁을 끝내고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며 “관련국 모두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평양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유엔(UN)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며 “(평양에) 가면서 말한 북미 간 대화의 중재와 촉진의 역할을 위한 것이다. 낙관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다리, 새로운 미래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청와대의 이런 자신감의 배경에는 남북 정상이 도출해낸 ‘9월 평양공동선언’이 있다. 총 6개조 14개항으로 구성된 공동선언에는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과 적대관계 해소 ▲교류협력 증대와 민족경제 균형적 발전 ▲이산가족 문제 근본적 해결을 위한 인도적 협력 ▲문화·예술·체육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과 교류 적극 추진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 진전 추진 ▲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방문 등이 담겼다.
이러한 성과에 한반도 주변 4강인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모두 호평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매우 흥미롭다”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기정사실화했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도 “북미 관계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한 협상에 즉시 참여할 준비가 돼 있다”며 비핵화 협상 재개를 선언했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새롭고 중요한 합의에 도달했다”고 평가했고,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변인은 “실질적이고 효율적 행보를 지지하고 환영한다”고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 역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평양선언에 미국이 요구해온 ‘핵 리스트 신고’ 등 현재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 포기에 대한 구체적 약속이 없어 기대이하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조건부 핵 시설 폐기를 명문화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비핵화 의지를 공식 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상당하다는 평가가 많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두고 미묘한 입장차를 보여온 4강이 한 목소리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을 만큼 절묘한 균형도 갖췄다. 향후 국제사회의 지지 확보가 보다 수월해 질 것으로 기대된다.
평양정상회담 사흘째인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 대통령의 ‘새로운 프로세스’…남북 관계 개선과 북미 비핵화 선순환
청와대가 밝힌 ‘새로운 프로세스’는 남북 관계 개선과 북미 비핵화 협상 ‘투트랙’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상호 시너지효과를 만들어 낸 것이 원동력으로 보인다. 어느 한 쪽이 막히면 다른 한 쪽도 막혔던 과거와는 확실히 다른 현상이다. 비핵화가 주춤하면 남북관계 개선으로 견인하고 그 관계 개선이 다시 비핵화를 추동하는 일종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 바탕에는 문 대통령의 취임 이후 축적된 남북 간 신뢰가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과 경제개발을 지렛대로 비핵화를 추진한 것은 문재인정부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이명박정부는 ‘비핵개방 3000’을 앞세워 북한이 비핵화하고 개방하면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까지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박근혜정부도 “통일은 대박”이라며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내세워 비핵화를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앞선 두 정부는 정책적 일관성이 부족했고 국내 정치문제에 북한을 이용하기도 했다. 결국 남북 관계 악화로 이명박정부는 2008년 금강산 관광을, 박근혜정부는 2016년 개성공단 가동을 중지해 남북교류를 단절시켰다. 여기에 비핵화 문제의 최대 당사국인 미국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실패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소위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를 내세워 북한 핵문제를 수수방관 했고, 그 사이 북한의 핵능력은 고도화 됐다.
반면 문재인정부는 일관되고 원칙적인 메시지와 행동으로 북한에 접근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7월 ‘5대 기조, 4대 제안’으로 된 독일 ‘베를린 구상’을 발표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이 이어지던 시점이다. 5대 기조는 ▲북한의 붕괴·인위적 통일을 배제한 평화 추구 ▲북한 체제 안전을 보장하는 비핵화 달성 ▲남북 합의 법제화와 관련국이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한반도 신경제지도 추진 ▲남북 간 비정치적 교류협력 사업 지속 등이다. 4대 제안은 ▲이산가족 상봉 ▲평창동계올림픽 북한 참가 ▲군사분계선에서 적대행위 상호 중지 ▲남북 대화재개 등이다. 1년이 지난 현 시점, 4대 제안은 현실화됐고 5대 기조는 지켜지고 있다.
비핵화 문제에 있어 미국과 철저한 공조체제를 구축한 것 또한 전임 정부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강력한 대북제재를 준수하면서도 다양한 경로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화 필요성을 설득해 결국 역사적인 6·12 북미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문재인정부의 노력에 북한도 호응하고 있다.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대표단 파견 이후 남북은 다양한 접촉을 이어가며 신뢰를 구축했고, 그 신뢰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이번 평양 정상회담이다. 이번 회담은 역대 남북회담과 비교해 준비 시간이 가장 짧았지만 형식과 내용, 결과물은 파격 그 자체였다. 남정상은 수차례의 공식 회담과 만찬, 오찬, 독대 등으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공식 선언문에 담기지 않은 비핵화 방안 등도 논의했을 것이 유력하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19일 남북 정상이 공동선언을 발표한 직후 “공동선언 내용 이외에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며 “이러한 논의 결과를 토대로 내주 초 뉴욕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미 비핵화 협상도 좀 더 속도를 낼 수 있는 논의가 가능해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결국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논의한 ‘비공개 비핵화 방안’를 들고 오는 24일 뉴욕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날 것으로 보인다. 회담 결과에 따라 2차 북미 정상회담은 물론 연내 종전선언도 사정권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해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미국 정부도 평양 정상회담을 환영하고 북미관계의 변화를 위해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며 “폼페이오 장관이 유엔총회 계기로 뉴욕에서 갖기로 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의 고위급회담이 잘 이뤄지면 2차 북미 정상회담도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20일 오전 2박 3일간의 평양 방문을 마친 뒤 삼지연 공항으로 향하는 공군 2호기에 올라 환송하는 평양 시민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평양 공동취재단, 이성휘 기자 noirciel@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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