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의 미학'이란 말이 있다. 구질구질하지 않게 깨끗이 떠나야 아름답다는 말이다. 미련이 남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아듀(작별)'할 줄 아는 사람은 멋지다. 그러나 누군들 멋지고 싶지 않겠는가. 우리 인간은 미련과 욕심 때문에 떠나야 할 때 제대로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14일 프랑스의 한 정치인이 ‘떠남의 미학’을 실천해 감동을 줬다. 프랑스인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알랭 쥐페(Alain Juppe)가 40년간의 정치인생을 마감하고, 25년간 유지했던 보르도(Bordeaux) 시장직을 사임했다.
쥐페는 오랫동안 보르도 시장으로 일하면서 보르도를 프랑스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그는 노면전차 등의 대형 프로젝트를 통해 바스티드(Bastide)와 같이 낙후된 지역을 재개발해 보르도 지역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륀 항구(Port de la lune)를 아름답게 보존해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게끔 한 공로도 있다.
오늘날 보르도하면 쥐페를 떠올릴 정도로 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쥐페는 미련 없이 보르도 시장을 그만두겠다고 발표했다. 시청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박수로서 그의 노고에 감사를 표시했고, 쥐페는 감동의 눈물로 시민들에게 화답했다. 그의 적수였던 사회당의 장 뤽 글레이제(Jean-Luc Gleyze)도 "쥐페는 그의 흔적이 새겨진 보르도와 프랑스 정치에서 두드러진 정치인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쥐페는 기자회견에서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늘날 격변하는 상황은 정치적 욕망을 사라지게 했다. 사람들은 독을 품고 있다. 언어, 육체 등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명망 있는 정치계는 부패로 신뢰를 잃고 있다…." 그가 정계은퇴를 발표하며 사용한 단어들은 아마도 그의 가슴 속 쓰라림을 표현했을 것이다. 쥐페는 강한 캐릭터와 소신으로 지난 40년간 적지 않은 정치적 수훈을 세웠다. 부정을 저지르고 배은망덕한 자들이 승리하는 정치권에서 그는 항상 완벽한 의리의 표상이었고, 특히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멘토인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 전 대통령과의 의리를 저버리지 못해 형무소까지 다녀왔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그의 용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치인으로서 쥐페는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 에두아르 발라뒤르(Edouard Balladur) 정부와 시라크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과 수상을 지냈고, 2010년대에는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zy)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물론 잘못된 선택도 있었다. 2017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2위로 밀려 프랑수아 피옹(Francois Fillon)에게 후보 자리를 내줬지만 이른바 '피옹게이트'로 피옹이 수세에 몰리자 공화당의 구원투수가 되어달라는 많은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지금 제5공화국 역사상 가장 큰 혼돈에 빠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페는 여전히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으며 지혜와 절제, 능력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인기가 식지 않고 있는 쥐페가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니 한국 정치인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우리 정치권에서는 이런 장면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국민의 박수를 받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퇴장한 정치인이 몇 명이나 있었나. 손에 꼽기 어렵다고 본다.
한국 정치인들과 떠남의 미학은 인연이 없는 듯하다. 그들은 깨끗이 떠나는 것보다 잠시 숨고르기를 하다 여론이 잠잠해지면 정계로 복귀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철새 정치인도 많다. 역사 속으로 퇴장해야 할 사람들이 돌아와 당 대표를 하겠다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일도 있다. 인물이 그렇게 없어 저런 사람들이 다시 나오나 싶은 생각에 자괴감마저 든다. 당권경쟁이 한창인 자유한국당의 경우 박근혜정부 당시 법무부 장관·국무총리를 지냈던 황교안, 서울 시장 시절 이른바 '무상급식 투표'로 서울을 분열시키고 막대한 세금을 축낸 오세훈, 5·18 광주민주화운동 폄훼 논란의 중심에 선 김진태. 이들 중 한 사람이 한국당의 선장이 될 것을 생각하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감옥에 있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을 배출한 한국당이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이번 전당대회야 말로 세대교체의 장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그 나물에 그 밥'인 한국당을 바라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야당이 튼튼하고 건강해야 여당의 독주를 막고 정치는 발전하는 법인데,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걱정이 앞선다. 탄핵정국 이후에도 한국당이 이처럼 지리멸렬한 것은 책임지고 떠난 사람이 없고 기득권만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가 쇄신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인들이 때를 알고 아름답게 떠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런 덕목을 당 윤리강령에 삽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보르도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정계를 은퇴하는 쥐페를 보며 이런 우스꽝스런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한국 정치인들이여, 쇄신하라"는 질책 아닌 질책을 오늘도 해 본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sookjuliette@yahoo.fr)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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