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내연관계에 있던 박사과정 지도교수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무고한 혐의로 1, 2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은 40대 여성이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았다. 이번 판결은 이른바 '그루밍 성범죄' 성립을 대법원이 폭넓게 인정한 것으로, 의미가 적지 않아 보인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무고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다시 판단하라며 사건을 대전지법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17일 밝혔다.
대법원 청사 전경. 사진/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사건의 시작은 2013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문대 출신으로, 남편과 사별하고 두 아들을 키우고 있던 A씨는 광주에 있는 모 심리상담센터에 등록해 전문상담사 수련을 하면서 센터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대학교수 B씨를 처음 만났다. B씨의 적극적 권유로 수련을 지도 받던 A씨는 이듬해 3월 B씨가 재직 중인 대학 상담심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B씨가 박사과정 지도를 맡았다.
A씨의 B씨에 대한 친밀감의 표시는 적극적이었다. '존경한다, 사랑한다, 데이트 하고 싶다'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메시를 수시로 보냈고, B씨를 위한 간식과 보약을 지극정성으로 챙겼다.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8개월 뒤에는 B씨가 사는 아파트 옆동으로 이사까지 했다. A씨 동료들 사이에서는 '스캔들이 날까봐 걱정된다. 도가 지나치다'는 우려가 나왔다. A씨는 따로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2014년 12월 첫 성관계를 가진 뒤 사람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다. A씨는 B씨 아들이 다니는 피트니스센터에 등록해 B씨 아들과 함께 운동을 하고 자신을 '이모'라고 칭하면서 자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 4월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B씨 아내가 눈치를 채고 두 사람이 '무인텔'에 투숙했다가 나오는 장면을 잡은 것이다. B씨 아내는 같은 해 7월 B씨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내고 A씨에게도 혼인파탄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A씨가 '15회에 걸쳐 위력에 의한 성폭행을 당했다'며 B씨를 고소했다. 함께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여성 동료에게도 '같이 B교수를 성폭행범으로 고소하자. B교수 밑에 있으면 앞날이 좋지 않다'고 회유했다. B씨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이 성폭행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도 했다. B씨도 A씨를 무고죄로 맞고소 했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처음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한 날짜를 번복했다. 동의했던 거짓말탐지기 조사도 돌연 거부했다. 결국 B씨에 대한 고소도 2개월만에 취하했다. B씨 아내가 낸 소송에서도 일부 패소해 판결이 확정됐다. 검찰은 B씨를 '혐의없음(증거불충분)' 의견으로 불기소 처분하고 A씨를 무고혐의로 기소했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사회봉사 200시간도 명령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주장하는 정황은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은 뒤 내연관계로 발전했다는 피해자 주장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또 "피무고인 아내가 제기한 손해배상책임을 면하고 내연관계에 있었음을 감추기 위해 피무고인을 고소한 것으로 보여 무고의 동기도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A씨가 함께 주장한 2016년 6월 B씨의 강간 미수 혐의도 증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특히, '그루밍 수법'에 의한 성범죄를 당했다는 A씨 주장에 대해 "피고인이 강간피해를 당했다는 당시 나이가 만 38세로, 슬하에 10대인 아들 2명을 둔 성인이었던 점,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고학력 여성이었던 점, 피무고인이 특별히 피고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볼 증거가 없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피고인이 피무고인과 성관계를 맺을 당시 그루밍 수법에 의해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결했다.
A씨는 무죄를, 검찰은 양형이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각각 항소했다. 그러나 항소심 판단도 1심과 같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고소사건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와의 내연관계가 드러난 이후부터 그루밍 수법에 의한 성폭력을 당했다는 취지로 주장을 변경했는데, 변경된 주장내용들은 당초의 고소사실과 그 주요내용을 완전히 달리한다"며 A씨의 주장을 배척했다.
재판부는 또 "무고는 국가의 형사사법기능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인 점, 강간죄는 중하게 처벌될 수 있는 범죄로서 피무고자에게 매우 큰 법적 위험이 발생한 점, 피고인이 무고 범행을 부인하면서 전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고, 도리어 언론매체를 활용해 피고인의 주장이 모두 사실인 양 방송 등이 이루어지도록 한 점 등을 고려하면 양형이 가볍다는 검찰의 주장은 옳다"고 판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해 형을 가중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수사기관에서 한 진술의 기본 취지는 자신의 삶의 곡절, 평소 성정, 피무고인을 만날 당시 처지와 심리적 상태,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여러 일 등을 나름의 근거로 밝히면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을 당했다고 호소한 것"이라며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는 원심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루밍에 의한 성관계 주장 역시 "공소제기 이후 변호인이 피고인의 주장에 터 잡아 개진한 것으로 보여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고 지적했다.
또 "피고인이 첫 성관계를 언급하면서 피무고인의 폭행·협박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피해의 정황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면서 "피고인의 일관된 입장과 태도에 주목하면 피고인의 주장하는 사실이나 사정 자체를 허위라고 볼 수 없는 이상 경우에 따라 피고인이 내린 주관적 법률평가가 잘못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언정 피고인이 허위사실을 고소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특히 "피고인과 피무고인은 전문심리상담자격 수련생과 수련지도자, 내담자와 상담자의 관계에 있다가 제자와 지도교수 관계가 추가돼 '3중의 중첩된 관계'를 맺게 됐다"면서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박사과정의 지도교수와 제자라는 위계적 관계에 더해 피고인이 피무고인에게 내면의 모든 고민과 상처를 고백하고 그 해결책을 상담받아 왔던 점까지 함께 고려하면,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피무고인의 권위에 내키지 않더라도 복종하거나 그와 맺은 신뢰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거기에 적법한 증거 등에 의하여 알 수 있는, 피고인이 처했던 당시의 상황, 두 사람의 나이 피고인이 피무고인에게 상담을 받게 된 계기나 주된 상담 내용, 상담과정 중 피무고인의 발언, 성관계가 이루어진 경위와 당시 정황까지 모두 고려하면, 두 사람의 성관계가 피고인의 자유의사 내지 성적자기결정권이 제압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쉽게 배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피고인이 박사과정 중 다른 남자와 교제하고, 피무고인에게 결혼 예정임을 통보한 사정이나 피무고인의 처로부터 소송을 당한 이후 비로소 피무고인을 고소를 한 사정, 피무고인이 혐의없음 처분을 받은 사정, 최초 피해일자 관련 피고인의 진술이 변경된 사정 등은 법리에 비추어 무고죄 성립의 충분한 근거로 삼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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