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플레이션 사회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동안 내내 친구 레나의 집에 머물렀다. 모스크바 시절 내 생활의 중심지였던 학교를 찾아가려는데 철학부가 신축 건물로 이전됐다고 레나가 알려 준다. 많은 것이 변한 가운데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앞을 지키는 역무원 초소는 변하지 않은 것들 중 하나다. 새것으로 바뀐 열차 안에는 ‘배낭을 벗으세요.’ 같은 공익 광고가 영상으로 나오고 승객들의 표정은 밝아 보인다. 1990년대 그 시절, 과외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올 때 지하철 안에서 보던 승객들의 무표정에는 늘 우울함과 고단함이 배어 있어 열차 안 공기도 무겁게 다가오곤 했다. 하지만 가끔 놀라운 일도 있었다. 피곤해서 기대어 선 채 조는 나를 어떤 할머니가 부르더니 손녀에게 말하듯 “얘야, 여기에 앉거라.”하며 자신의 자리를 권한 것이다. 나는 물론 사양했지만 그녀의 험한 손을 보면서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90년대의 모스크바가 몹시 낯설고 새로웠다면, 2019년에 다시 만난 모스크바는 서울과 별 차이를 못 느끼게 비슷해 보인다.
러시아인들에게 90년대는 혼돈과 격변의 시기, 무질서와 곤궁이 일상을 지배하던 시절로 기억된다. 옐친의 ‘충격 요법’에 의한 시장경제로의 급진적 전환은 대다수 국민들로 하여금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반면, 소수의 누군가에겐 졸부가 될 최적의 기회였다. 소련이 해체된 후 국영기업들의 민영화 과정에서 특권층인 공산당 고위 관료(노멘클라투라)들이나 그들의 비호를 받는 자들이 정경유착과 탈세를 통해 국유기업을 헐값에 불하받고 신흥재벌(올리가르히, 과두제에서 따온 용어)로 탄생했다. 이른바 ‘신러시아인’(노브이 루스키)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마피아와 결탁돼 있거나 그들이 곧 마피아이기도 했는데, 석유, 가스 등 자원 분야와 항공, 제조업, 언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경제 전반을 장악했다.
그 시기 옐친이 미국의 각종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고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옐친 행정부가 추진한 개혁정책이 하버드대 경제학자들과 미국 정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입김대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충격 요법’을 통한 가격자유화와 민영화는 급격한 생산 감소와 루블화 가치 추락, 초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개혁 첫해인 1992년 러시아의 물가상승률은 2,509%에 이르렀고 실질 경제성장률은 -14.5%였다. 국영상점의 진열대는 텅텅 비었다. 한국에서 빈 진열대를 텔레비전 뉴스로 보았지만, 당시 뉴스를 잘 신뢰하지 못했던 나는 모스크바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상점으로 달려갔다. ‘아... 뉴스가 맞았구나!’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며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학교 옆 지하철역 시장, 그때와 지금
국영상점의 텅 빈 진열대와 관련해 레나의 어머니가 들려준 경험담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당시의 현실이었음을 보여 준다. “하루는 동네 지하철역 앞에 있는 상점에 들어갔는데, 진열대에 고기 대신 남자 팬티가 있지 않겠니. 내가 점원에게 치우라고 말했더니, 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혹시 누가 이걸 사 갈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하더구나. 그 일을 절대 못 잊을 거야.” 당시 그녀 역시 모든 러시아 서민들처럼 월급을 몇 달째 못 받고 있었다. 이 ‘보통 사람들’은 체불된 월급이나 연금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물가 상승에 떠밀려 길거리로 나왔다. 1992년 옐친이 모든 러시아인들에게 자유로운 거래를 허용한 덕분에(!) 그들은 각자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하나씩 팔거나 혹은 다른 경로로 획득한 상품들을 팔기 시작했다. 심지어 물물교환도 가능했다.
학교 근처 지하철역 ‘우니베르시쩨뜨(대학)’ 옆에도 늘 평범한 시민들이 열을 지어 늘어서서 물건들을 팔았는데, 주로 연금에 의존해 살아야 하는 노년층이 많았다. 주말농장(다차, 오두막 별장)에서 직접 키운 채소부터, 꽃, 건어물, 병에 나누어 담은 가양주나 보드카, 과자, 오래된 책, 장화, 공구 등 판매 물품은 다양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물건들도 많아져 청바지, 코트, 장난감, 운동화를 비롯해, 한국산으로는 초코파이가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어느 날 ‘솔’ 담배가 우니베르시쩨뜨역 야외시장에 나타나 한국 유학생들을 기쁘게 했는데, 아마도 1994년 국내에서 담배 가격을 인상하면서 솔만 저가 담배로 전환하기 위해 값을 내렸기 때문에 러시아 보따리 무역상들이 그즈음 들여왔던 듯싶다.
양손에 꽃 한 다발씩을 들고 서 있던 할머니나 신문 두어 부를 들고 선 할아버지를 보면 저거 하나 팔아서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했지만, 빵을 한 덩어리도 아니고 반 덩어리만 사 들고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던 시절, 그것은 절대 빈곤에 던져진 서민들이 살아남기 위한 한 방법이 됐다. 우니베르시쩨뜨역의 야외시장은 집에서 들고 나온 물건과 각종 잡화를 파는 연금생활자들,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천막 아래 매대 자릿세를 지불하는 상인들로 붐비는 큰 시장이 돼 갔다.
모스크바 생활 초창기, 이 시장에서 내가 저지른 실수는 이랬다. “감자 2킬로그램 주세요.” 길에 서서 감자를 팔던 한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내가 말했다. 그녀가 손을 내민다. “비닐봉지!” “없는데요.” “그럼 못 사지. 감자를 안고 갈 거요?” 다음날 비닐봉지를 준비해 가니 감자는 더 이상 없다. 물건은 눈에 보일 때 사야지, 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덕분에 이 시절 내게는 특히 화장실 휴지가 눈에 보이면 빨리 사는 버릇이 생겼다(휴지 2~3개를 들고 서서 파는 사람도 있었다). 필요한 물품을 놓치지 않으려면 비닐봉지를 늘 가방에 넣고 다녀야 했고, 귀한 거니 빨아서 말려 한 장을 4~5회씩 사용하곤 했다. 6·25를 겪은 부모님 세대의 고생을 새삼 떠올리게 된 시간이었다.
2019년 여름, 학교 지하철역에 내려 보니 시장이 있던 터가 휑하니 광장처럼 바뀌었다. 가게들이 들어선 작은 건물들이 몇 개 서 있는데, 한 건물의 구석에 기대어 꽃을 파는 여성과 옷을 파는 여성이 보인다. 꽃을 파는 엘리소 씨는 그루지야(조지아) 출신이고 옷을 파는 스베따 씨는 러시아의 다른 지방에서 왔다. “90년대에는 여기에 시장이 있었는데... 언제 사라졌나요?” 내가 꽃을 사면서 물었다. “나도 그 시장에 작은 빨라뜨까(천막 노점)가 있었어요. 그런데 2008년에 철거됐지요.” 엘리소 씨가 대답하더니 스베따 씨에게도 묻는다. “5년 전(2014년)일 걸요?” 두 대답이 나온 이유를 나중에 친구 미샤를 통해 알았다. 지역 주민인 그의 말에 따르면, 지하철 우니베르시쩨뜨역 시장은 2006년부터 여러 차례 폐쇄가 시도됐고(그러니 2008년도 포함된다) 2015년 초에 마침내 완전히 제거됐다고 한다. “전엔 빨라뜨까 빌리는 데 2,000유로, 그러니까 100,000루블을 냈어요. 당시는 유로로 지불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작은 자리에 150,000루블을 월세로 내지요.” 엘리소 씨가 한숨을 쉬었다. 뭔가 복잡한 감회 속에 나는 그녀와 옛 시절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나눈 후 자리를 떴다.
건물 찾기의 의미
철학부가 있던 제1인문관은 텅 비어 있었다. 방학이어서라기보다 ‘제1교육관’으로 불리는 새 건물 슈발롭스키관(모스크바대 설립자 중 한 명인 슈발로프의 이름을 땄다)으로 2007년부터 이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몇 년 후에는 로모노소프의 이름을 딴 로모노솝스키관이 같은 모양으로 세워졌다. 지하철역에서 도보 15분이라는 이 거대한 신축 건물들을 결국 찾지 못한 채, 나는 옛 건물 입구만 다시 보았다. 1960년대 후반에 세워진, 나에겐 90년대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건물이 여러 시간 속에 잠겨 있다.
글·사진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