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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오빠가 분신한 그때, 김순호씨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최동 열사 여동생 최숙희 씨, 김 국장에 공개 서신
입력 : 2022-09-02 오후 9:42:15
 
[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오빠는 무릎을 꿇기 보다는 마지막 싸움의 의미로 분신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요."
 
고 최동 열사의 여동생 최숙희씨는 2일 떨리는 목소리로 <김순호에게 부치는 편지>를 낭독했다. 이날 오후 6시30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밀정 김순호 사퇴 및 경찰국 해체를 위한 시민문화제'에서다.
 
민주노동 운동가인 최 열사는 1989년 4월 '인노회 사건' 당시 치안본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나온 다음 해인 1990년 8월7일 그 후유증으로 인해 분신 사망했다. '밀정' 의혹이 제기된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은 최 열사의 성균관대 후배로, 1988년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 부천지구장이었다. 
 
'인노회' 사건 강압수사 후유증으로 숨진 고 최열 열사의 여동생 최숙희씨가 2일 오후 6시30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밀정 김순호 사퇴 및 경찰국 해체를 위한 시민문화제'에서 '밀정' 의혹을 받고 있는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에게 보내는 공개서신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강병현PD)
 
최씨는 최 열사와 김 국장의 사이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순호씨가 오빠와 대학 다닐 때 저희 집은 대학로 동숭동이었지요. 집과 학교가 가까워 자주 놀러왔었어요. 술 먹고 갈데 없으면 오고, 세미나 한다고 선후배들과 함께 오고. 밤을 새우고 토론하다가 자고가곤 하였지요.  새벽장사를 나가던 어머님이 준비해주신 따뜻한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갔던 기억이 나는지요."
 
이어 "오빠가 대학 2학년 때 친구들과 심산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까.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했다"면서 "오빠 친구들이 그러더라. (오빠가) 무척 아끼는 후배였다고. 광주 출신이어서 더 열정을 가지고 챙긴 후배라고"말했다.
 
최씨는 "89년 8월10일 김순호씨는 경장으로 특채돼 대공본부 대공 3과에 있었다"면서 "인노회를 수사했던 곳에 특채됐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또 "90년 8월7일 오빠는 무릎을 꿇기 보다 마지막 싸움의 의미로 분신했다. 그때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며 "20대 초반에 형성된 가치는 삶의 굴곡이 있어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당신 자신을 속이고, 동료를 속이고 180도 돌아서 정 반대 입장에 서게 했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이 치안본부에서 대공업무로 쌓아올린 것 때문에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느냐"며 "당신의 부끄러운 업적이 오빠를 죽음으로 몰아갔는데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느냐. 오빠의 목숨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었느냐"고 따져 물었다.
 
최씨는 "30년간 피눈물로 살아간 우리 어머니를 기억하느냐. 49제를 지낸 후 우리 아버지는 아들을 혼자 보낼 수 없어 동행의 길을 떠났다"면서 "김순호씨도 꼭꼭 숨겨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당신도 아는 진실을 이제는 세상에 밝혀라"고 김 국장을 향해 요구했다.
 
최 열사는 1990년 8월7일 숨졌다. 그날 오전 9시10분쯤 최 열사가 서울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 사회과학대학 2층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는 것을 학교 직원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했다.
 
부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최 열사는 숨지기 전 해인 1989년 4월28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불법 연행됐다. 김 국장은 이즈음 인노회에서 빠져나와 잠적했다.
 
최 열사는 정신적 압박을 못이겨 연행 다음날 대공분실 욕조 모서리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머리가 5cm 가량 찢어졌다. 같은 해 5월18일에는 입감 중이던 서울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칫솔로 자신의 목을 찔러 지름 1.5cm 크기 구멍이 두군데나 뚫리는 중상을 입었다. 
 
두 번의 자해 때마다 최 열사는 경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제대로 된 치료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병원에서 돌아온 뒤에도 계속 수사를 받았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치안본부는 최 열사를 상대로 20여일 동안, 유독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다. 연행 첫날부터 48시간 동안 잠을 안 재우는가 하면, "안기부로 넘기겠다"고 협박하는 등 심각한 정신적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경찰이 집요하게 캐물은 것은 인노회와 관련이 전혀 없는 북한과의 관계·주사파·성균관대 운동권 계보 등 광범위한 조직망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 열사에게 가장 큰 정신적 압박으로 작용한 것은 자신의 행적을 담은 30여장의 사진이었다. 친구의 결혼식 장면, 이삿짐을 옮기는 장면 등 최 열사가 연행되기 전 한달 반 동안의 행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 인노회 동료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 사진들을 본 최 열사는 경찰의 집요한 추적수사로 부천지역 노동운동 조직이 모두 파괴됐다고 생각했다. 
 
최 열사가 숨진 뒤 그의 책상서랍에서는 "구치소에서 가해진 음모 앞에서 그들이 의도했던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구치소에서 당했던 얘기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100% 사실입니다. 무기력하고 무능한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폐인이나 다름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최 열사 필적메모가 발견됐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최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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