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신유미 기자] "여기는 금융기관 관계자를 만나더라도 사전 미팅 예약할 필요 없이 소개만 하면 근처 카페에서 만나 커피 마시면서 사업 논의를 할 수 있어요"
싱가포르에서 만난 국내 핀테크 업체 관계자들은 마리나베이의 밀집된 금융 환경이 스타트업에게 열린 기회로 다가온다고 말했습니다. 개방적인 네트워크 환경 뿐만 아니라 금융사 및 투자자, 스타트업 등이 한 곳에 몰려있어 물리적인 환경 역시 '횡단보도만 건너면' 만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취재팀이 만난 싱가포르 금융업 종사자, 기관, 전문가 역시 금융중심지의 이점을 강조했습니다. 다만 싱가포르를 비롯한 다른 나라 모델을 추종하기보다는, 우리만의 모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금융허브로 거듭난 나라들의 상황과 우리나라의 여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특화 금융허브를 해법으로 제시합니다.
한국 실정과 동 떨어진 금융 허브 전략
정부는 지난 2003년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전략'을 시작으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왔습니다. 2008년 2월 '금융중심지의 조성과 발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이듬해 금융중심지로 서울 여의도(종합금융중심지)와 부산 문현지구(특화금융중심지)를 지정했습니다. 국제금융중심지 지수(GFCI)에서 서울은 2023년 3월 10위, 부산은 37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다만 '아시아 사자'로 같이 불리는 싱가포르, 홍콩과 비교하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글로벌 금융중심지 적합도를 평가하는 항목으로는 실물경제 발전(경제 규모),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법체계와 경제시스템, 국제화 수준(영어 통용 정도) 등입니다. 국가별 경제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명목GDP의 경우 싱가포르에 비해서는 우위에 있지만, 다른 선진국들이나 중국에 비해 큰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법 체계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평가하는 항목에서도 열위에 있습니다. 우리나라(25위)는 중국(50위)을 제외하면 우리보다 국제금융평가(GFCI) 순위가 높은 국가들에 비해 나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는 반면 싱가포르(4위)는 미국(21위)과 영국(16위)보다도 순위가 높았습니다. 글로벌 IB들은 싱가포르 금융당국이 법집행에 있어서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하고 있는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금융중심지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언어 문제가 해결돼야 할 것입니다. 싱가포르가 홍콩을 제치고 금융허브로 도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영어권 문화라는 점이 꼽히기도 합니다. 싱가포르는 EF 영어 능력 지수 2022에서 아시아 1위, 세계 2위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식 '디지털 금융중심지' 만들어야
글로벌 금융중심지 역할을 하는 국가들에 모든 항목에 미흡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싱가포르와 비교하더라도 경제 규모와 언어 면에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벤치마킹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한 상황입니다. 전문가들은 금융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글로벌 금융허브‘ 도약만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우리 실정에 맞는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NUS) 경제학과 교수는 "싱가포르는 원래 허브였을 뿐만 아니라 영어권이기 때문에 동남아 중심 파이낸싱이 가능했다"면서 "금융 허브를 추구한다면 중국과 일본 파이낸싱 한다는 건데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국내 핀테크 업체 관계자들은 마리나베이의 밀집된 금융 환경이 스타트업에게 열린 기회로 다가온다고 말했습니다. 싱가포르 강가에서 바라본 마리나베이 금융지구에 밀집된 빌딩가 모습. (사진=신유미 기자)
우리나라가 경쟁력이 있는 정보통신기술(ICT) 기반으로 글로벌 중심지 전략을 재구성해야한다는 제언이 나옵니다. 김묵한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영역에서 선두를 잡기는 굉장히 어려운일이지만, 새로 만들어지는 디지털 금융이나 핀테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산으로 대응하기 상대적으로 유리한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디지털 금융 분야에서 한국은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환경입니다. 우리나라는 ICT 혁신역량, 제조업 기반, 인적자원, 금융혁신을 이끄는 핀테크산업 등에서 높은 혁신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서울은 2022년 국제금융중심지지수(GFCI) 핀테크 순위에서는 서울이 4위를 차지하는 한편 2021년에는 블룸버그 혁신지수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습니다.
글로벌 디지털 금융 중심지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특구' 조성이 거론됩니다. 비슷한 예로는 영국과 싱가포르의 사례가 있는데요, 영국 정부는 2010년 런던 동부 지역에 IT 클러스터인 테크시티(Tech City)를 조성했습니다. 디지털 산업과 스타트업 육성을 위해서입니다. 싱가포르는 스타트업 산업단지 JTC 론치패드를 구축한 바 있습니다.
핀테크와 관련 기관들이 한 지역에 집적되면 핀테크 업체 간 기술제휴와 협력, 자금지원, 교육, 인재육성 등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특구 조성보다는 금융 중심지 '라이선스'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윤석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특정 지역으로 한정하기 보다는 규제샌드박스처럼 우리나라 안에서 디지털금융업과 관련한 일종의 혜택을 줄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말했습니다. <끝>
서울이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금융에 특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진은 IFC 빌딩이 위치한 동여의도 전경. (사진=허지은 기자)
싱가포르=신유미 기자 yumix@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