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사진은 글과 무관. (사진=픽사베이)
[뉴스토마토 신유미 기자] 20년 간 신호등이 없었던 횡단보도에 얼마 전 신호등이 생겼습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작은 건널목에만 횡단보도 세 개가 연달아 놓여있습니다. 그 중 가운데 횡단보도에는 신호등이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 생긴 겁니다. 신호등을 건너면 구청 보건소가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선별진료소 방문객이 많아지면서 신호등을 설치한 모양입니다.
어릴 적 등교를 하거나 학원을 다닐 때 반드시 지나쳐야 했던 곳인데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는 성격 급한 제 ‘최애’ 통로였습니다. 이 횡단보도에는 왜 신호등이 없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죠. 그 곳을 건너면 어쩐지 무단횡단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친구들끼리는 그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무단횡단’했다고 표현하기 일쑤였습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의 의미를 알게된 건 성인이 된 후입니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필기시험을 치면서야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보행자 우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동안 공사가 덜된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초등학생 때 피아노 학원을 오가며 차가 올세라 부리나케 횡단보도를 뛰어다녔던 기억이 스쳐 지나가더군요. 어딘지 속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어도 기다려주는 차량은 없었거든요. 때로는 횡단보도 위에서 차량이 먼저 지나가길 기다려주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차량이 멈춰서면 내쪽에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했죠. 보행자 우선이라는 규칙은 잊혀졌던 겁니다.
신호등이 생겨버린 횡단보도는 법이 있어야만 규칙을 지키는 모습을 반영합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는 효율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처벌이나 신호가 없어도 자율적으로 규칙을 지키리라는 신뢰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이런 신뢰는 대체로 작동하지 않는 듯 합니다.
얼마 전에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블랙박스 영상이 논란이었는데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다가 비접촉 사고가 났다는 내용입니다. 운전자가 코앞에서 멈추자 놀란 할머니가 넘어져 수술비를 청구했다는 글이었습니다. 애매하다는 반응도 있는 반면, 운전자 과실이라는 여론에 무게가 실렸습니다. 보행자 우선 구간에서 미리 멈추지 않고 코앞에서 멈춘 게 문제라는 거죠.
사회의 관용과 윤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법과 처벌 만능주의가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제도가 의식에 선행합니다. 규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법 만능주의의 자화상은 어딘지 씁쓸하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법에 저촉되지 않는 행위는 괜찮아’라는 신호를 주기 때문입니다. 신호등이 새로 생긴 횡단보도가 아쉽습니다.
신유미 기자 yumix@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