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국내에선 너무도 생소한 이름입니다. 물론 물리학 공부 경험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현대 물리학의 근본 체계가 뒤바뀌게 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불리는 원자 폭탄 개발.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인류 최대 천재로 불리던 앨버트 아인슈타인. 그 조차도 원자 폭탄 개발에 부정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실제 역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바람과는 달리 인류 역사의 시작은 1945년 7월 16일을 기점으로 뒤바뀌게 됩니다.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줬다가 영원의 고통을 받게 된 프로메테우스. 이 신화처럼, 이날 인류는 인류 스스로를 멸망으로 이끌 수 있는 ‘불’을 발견합니다. 이날은 인류 최초 핵실험 ‘트리니티 테스트’가 이뤄졌습니다. 성공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원자 폭탄 개발이 성공된 날입니다. 이 실험을 주도한 인물, 바로 제일 앞에 언급한 오펜하이머입니다. 유대계 미국인 오펜하이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을 주도한 ‘맨해튼 프로젝트’ 총책임자였던 물리학자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를 통해 거대한 딜레마 그 자체를 스크린에 투영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불, 인류를 되살릴 희망인가 아니면 재앙인가’라고 묻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놀란 감독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역설의 개념 안에 존재합니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그리면서도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 속에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 시선으로 우리 모두에게 질문하는 얘기입니다. 양가적 입장이면서도 상반된 평가로 해석될 만한 오펜하이머는 그래서 논쟁과 논란의 인물이면서도 인류 전체 현대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사건 중심에서 바라볼 때 무엇을 어떻게 쪼개고 또 더해서 평가해야 할지를 모두에게 질문하는 듯합니다. ‘원자 폭탄’ 개발에 누구보다 앞장서고 누구보다 적극적이던 그가 왜 정작 원자 폭탄이 개발되고 실제 사용이 된 뒤 더 강한 수소 폭탄 개발과 앞서 개발된 원자 폭탄 사용까지 반대 해왔는지. 이런 양면적이고 역설적 방식에 러닝타임 180분이 집중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180분 러닝타임, 오펜하이머와 그를 실질적으로 맨하튼 프로젝트로 이끈 미국 원자력에너지위원회 창립 위원 루이스 스트로스의 시선으로 분산돼 구성돼 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시선에선 컬러, 스트로스의 시선에선 흑백으로 처리가 됩니다. 2차 대전 이전부터 공산주의자들과도 허물 없이 소통하던 오펜하이머의 다양성에 대한 시선 그리고 종전 이후 미국을 덮친 매카시즘 광풍 속 핵심 인물이던 스트로스의 치우친 시선. 그것에 대한 일종의 영화적 비평의 표현 방식일 듯합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영화 속에서 러닝타임 120분이 흘러갈 때까지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 그 자체에 집중합니다. 그는 물리학도로서는 사실 열등생이었지만 우주의 신비를 파헤치려는 목표 뚜렷했던 순수 물리학도였습니다. 때문에 그의 시선과 상상 속에서 스크린에는 끊임없이 우주를 상징하는 듯한 화려한 별들의 세계가 그려집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그런 오펜하이머는 단순하게 물리학에만 빠져 사는 괴짜는 아니었습니다. T.S 엘리엇의 시를 읆고, 피카소의 그림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으로서도 자신의 관심사인 우주에 대한 꿈을 확장시키는 방식을 투여합니다. 과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 만이 아닙니다. 이념적으로 반대 쪽에 서 있는 공산주의자들과도 스스럼 없이 교류를 합니다. 그의 애인으로 알려진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과의 오랜 관계는 결과적으로 자신을 죽을 때까지 옭아맨 색깔론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과 흐름은 인류 역사의 흐름 자체를 뒤 바꿔 버린 ‘원자 폭탄’ 개발을 주도한 그가 결정적으로 자신의 삶 자체가 이미 분열로 이뤄진 파편의 행보였던 것과도 비견될 수 있을 듯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그럼 그의 반대 급부는 어땠을까. 오펜하이머는 ‘맨하튼 프로젝트’에 대해서만큼은 주도면밀하고 또 급진적이며 가열찼습니다. 히틀러가 주도한 독일 나치의 핵 개발이 앞서자 ‘성공’의 영광을 뺏기지 않기 위해 더욱 더 박차를 가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정무적 책임자 그로브스 장군(맷 데이먼)을 설득해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내면서 존재하지 않던 강력한 무기의 탄생이란 ‘달콤한 꿈’을 당시 트루먼 정부에게 제시합니다. 이런 박차의 이면에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열쇠가 바로 ‘원자 폭탄’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하지만 아이러니, 즉 역설은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테스트’가 성공으로 마무리된 뒤부터 입니다. 이미 그 시기는 2차 대전이 종식 이후입니다. 결과적으로 ‘트리니티 테스트’ 성공은 실용화 단계의 원자 폭탄 생산으로 귀결되는 길을 스스로 뚫어 버립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트루먼 정부는 고심을 거듭해 왔고, 독일 히틀러의 항복 선언 이후에도 ‘트리니티 테스트’를 진행 성공시켰습니다. 이후 곧바로 원자 폭탄 생산에 돌입합니다. 불과 한 달도 안된 시점에서 결과적으로 ‘우라늄 235’ 기반 ‘리틀보이’가 히로시마, ‘플루토늄 239’ 기반 ‘팻맨’을 나가사키에 3일 간격으로 투하합니다. 끔찍한 살상력을 선보인 두 발의 ‘원자 폭탄’. 이후 트루먼 정부는 소련과의 군비 경쟁에 원자 폭탄을 활용하려 듭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의 핵심은 아마도 이 장면에서부터 일 듯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투하 이후 오펜하이머와 트루먼 대통령(게리 올드먼)의 만남. 이 장면에서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 살상력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누가 만들었는가를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다. 누가 투하 명령을 내렸는가를 기억할 뿐”이라 응수합니다. 인류를 살리기 위한 한 남자의 고뇌 그리고 우주의 비밀을 풀고 싶던 학자로서의 바람이 정치의 무대를 통해 인류를 멸망시키는 ‘불’이 된 순간입니다. ‘오펜하이머’ 원작이자 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이 책 제목처럼 오펜하이머가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뒤 영원의 고통을 받게 된’ 프로메테우스가 된 순간입니다. 이 장면에서의 오펜하이머의 표정, 그 자체가 영화 ‘오펜하이머’의 역설입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는 제목 그 자체로 인류 역사의 전환점을 상징하는 ‘원자 폭탄’ 개발을 주도한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박사의 전기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선 루이스 스트로스의 열등감 혹은 피해의식 또는 권력욕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원인을 돌리는 심리적 현상인 ‘투사’에 대한 보고서로서도 존재적 가치가 상당합니다. 때문에 ‘트리니티 테스트’ 이후 일본에 원폭 투하가 이뤄진 뒤 오펜하이머가 당시 미국을 집어 삼킨 매카시즘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게 된 모습 그리고 그 중심에 스트로스가 있진 않았을까 싶은 묘사는 또 다른 역설을 상징합니다.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분열을 상징하는 모멘텀과도 같은 아인슈타인과의 만남. 그 세 사람이 한 화면에 잡힌 시점이 ‘원자 폭탄’의 폭발 필수 요소인 원자 핵 분열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이 장면에서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원자폭탄’의 위험성은 이미 영화 초반 오펜하이머와의 만남을 통해 오롯이 언급됩니다. 이미 이 영화 전체의 흐름, 즉 시간의 흐름을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예감하고 또 예지 했단 얘기입니다. 물론 결정의 단계에서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의 방식이 한 사람을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 또 다른 한 사람을 ‘프로메테우스’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과적으로 ‘오펜하이머’는 하나의 거대한 원자폭탄 구조를 띈 가장 완벽한 설계 플롯인 셈입니다.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 대화에 놀란 감독이 주목하고 그 기점을 중심으로 스트로스가 분열의 버튼을 눌러 버립니다. 이미 세 사람은 목적은 달라도 어쩌면 같은 선택을 한 프로메테우스의 죄악을 짊어진 '각자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놀란 감독은 IMAX를 주로 사용하는 연출자답게 이번 ‘오펜하이머’에서도 최대한 시각의 확장을 위한 연출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에선 시각의 확장을 위해 사운드와 음악에 더 집중한 듯한 체험이 강하게 전달됩니다. 이런 방식은 영화 하이라이트이자 변곡점이 되는 ‘트리니티 테스트’에서 사용된 사운드 연출에 있습니다. ‘트리니티 테스트’ 폭발 장면에서 시각의 극대화와는 반대로 사운드를 극한으로 제한 시킨 결정. 체험의 또 다른 영역을 확장시킨 ‘킬링 포인트’입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는 언제나 논쟁적이고 언제나 필수적으로 관심을 끄는 마력을 지녔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앞서 언급한 역설의 개념을 통해 ‘흑과 백’ 충돌에 대한 답을 항상 관객들의 몫으로 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지점을 잡아내는 심미안을 품고 있기 때문일 듯합니다. 누구도 그의 작품에 대해 ‘맞다’ 또는 ‘틀리다’의 논쟁을 언급할 여력조차 내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를 통해 놀란 감독은 스스로가 ‘시네마틱 프로메테우스’로서 발돋움 했음을 증명합니다. 그는 매번 ‘NEXT 놀란’과의 대결을 위한 고통을 스스로 감내해야 할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다시금 증명시켰습니다. 15일 개봉.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