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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두 남자의 서로 다른 희망과 절망의 ‘화란’
18세 연규, 희망도 절망도 없는 삶…유일한 탈출구·유토피아 ‘화란’
입력 : 2023-09-25 오전 7:00:23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기준입니다. ‘느와르’란 영화적 장르. 우리에겐 1980년대 ‘홍콩 느와르’를 통해 대중화된 단어입니다. 하지만 시네마 느와르 정의를 굳이 ‘규정’하자면 뒷골목 세계 또는 범죄의 비정함과 어두움을 담아낸 장르적 문법입니다. 국내 상업 영화 시장에선 ‘한국형 느와르’란 단어로 포장되면서 범죄 장르의 하위 또는 병렬개념으로 분류 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느와르’, 불어로 ‘검다’란 뜻의 이 단어. 뒷골목이나 범죄의 행태와 속내 및 실체를 그리는 데 투영되는 일종의 색안경이 아닙니다. 삶에 대한 본질적 실체를 탐구하는 여러 방식 중에 하나. 그 여러 방식 중 ‘느와르’라 이름 붙여진 방법론. 그걸 개념적으로 잡고 들어가야 될 듯합니다. 누군가에겐 삶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이 포기할 수 없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겐 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 그 어디에서도 희망도 절망도 없이 머무를 수 밖에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화란’은 과거와 미래 사이 아무것도 없는 현재에 머물고 있는 치건(송중기)과 그 현재에 머물며 상처 받은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소년 연규(홍사빈)의 처절한 구원의 서사를 담았습니다. 치건이 연규를 외면할 수 없던 이유와 연규가 본능적으로 치건에게 다가선 선택.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며 자신을 구하고 결과적으로 서로를 구하기 위해 가장 슬픈 선택을 해야 할 운명을 이미 예감하고 있던 것 같았습니다.
 
 
 
먼저 연규입니다. 시작부터 강렬합니다. 돌덩이 하나를 움켜쥐고 운동장을 걸어갑니다. 누군가의 머리를 후려칩니다. 그리고 흙바닥 웅덩이 고인물에 던져진 돌덩이. 시커먼 흙탕물에 뒤 섞이는 핏물. 겨우 18세 연규가 겪는 고된 삶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일단 집구석, 꼴이 말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삶의 낙이 없습니다. 살아 있지만 죽었습니다. 그저 숨 쉬어 지니 사는 것 같습니다. 연규의 돌덩이 사건으로 학교에 불려왔지만 그 어떤 감정적 동요도 없어 보입니다. 연규는 그런 엄마에게 악다구니라도 피워보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입니다. 연규는 그저 벗어나고 싶습니다. 현실이 지옥 같고, 지옥이 지금 현실 같습니다. 피 튀기는 학교 생활, 사실 참을 만 합니다. 버틸 만 합니다. 하지만 연규도 아직 어립니다. 보호 받아야 할 미성년자입니다. 그러나 보호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삶이 살아지니 사는 것뿐입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이유는 재혼 남편이자 연규의 의붓아버지의 폭력입니다. 무자비하게 휘둘러대는 매질에 연규는 매일 당합니다. 이미 엄마도 그런 아버지에게 길들여져 버린 듯합니다. 아니 삶에 길들여져 버렸습니다. 그건 연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연규는 더 집착합니다. 지옥을 벗어나려고. 현실을 벗어나려고. 그에게 희망은 ‘화란’입니다. 네덜란드. 다양성이 존중 받는 나라.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살 수 있는 나라.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영화 '화란'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렇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희망의 ‘화란’을 쫓던 연규에게 존재하는 ‘화란’이 다가옵니다. 이복 여동생 하연(김형서)을 괴롭힌 놈을 혼내 주려 휘두른 돌덩이. 그 돌덩이에 얻어 맞은 학교 일진. 그리고 합의금 300만원. 연규의 사정을 우연히 듣게 된 치건. 치건은 연규와 자신 그리고 여러 사람이 머무는 ‘명안시’를 주름 잡는 폭력조직 중간보스. 치건은 오른팔 승무(정재광)를 통해 연규가 필요한 돈 300만원을 아무 조건 없이 내줍니다. 사채와 고리대금을 관리 감독하는 치건으로선 이례적 호의입니다. 그저 누군지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연규에게 말입니다. 연규에게 ‘화란’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손 내밀지 않던 자신의 삶에 처음 손을 내밀어 준 ‘어른 사람’ 치건. 연규는 치건에게 다가섭니다. 치건은 그걸 알고 있었던 듯 승무를 통해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만나야 할 운명이었던 듯싶습니다. 연규는 치건을 찾아왔고, 치건은 자신의 모든 것을 연규에게 가르쳐 주겠다 제안합니다.
 
영화 '화란'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느와르 장르에서 기본적 전제로 끌어가야 할 그리고 가장 큰 핵심은 공간의 지배력입니다. 각각의 인물들에게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관객들에게 ‘저들이 이럴 수 밖에 없었다’란 설득을 강조해야 할 장치. ‘화란’에선 가상의 도시 ‘명안시’가 그렇습니다. ‘화란’ 속 명안시는 사람들의 희망을 먹고 사는 괴물입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희망을 잃은 듯 ‘죽은 얼굴’로 살아갑니다. 그들 얼굴에서 삶의 의지는 없습니다.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포기입니다. 이 도시에서 괴물처럼 살아가는 치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미 과거에 죽었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치건은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도 그걸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 도시가 자신을 집어 삼키고 있음에도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썩은 정치, 그 정치와 결탁한 조폭이 휘어 잡은 이 괴물 같은 도시. 그 도시 정점에 선 큰 형님(김종수). 명안시는 결국 큰 형님의 큰 그림일 뿐, 자신도 결국 흩날리는 먼지에 불과하단 걸 치건은 압니다. 그래서 희망이 없습니다. 꿈이 없습니다. 그의 오른쪽 귀에 남은 무언가에 뜯긴 상처. 그 상처의 깊이만큼 치건은 가라앉고 침잠하는 어둠 속에 스스로를 더 가둬버리기만 합니다.
 
영화 '화란'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래서 치건의 눈에 연규가 보였나 봅니다. 치건은 흔들립니다. 연규를 구하고 싶습니다. 건져 올리고 싶습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이 더러운 구정물 같은 도시에서 이 소년만큼은 건져내 올리고 싶습니다. 치건의 뜯긴 오른쪽 귀 상처에 얽힌 사연. 그 사연이 치건을 연규에게 대려다 준 것 같습니다. 아니 사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치건은 모두가 괴물이 돼 버린 이 도시에서 단 한 명, 사람이고 싶어하는 연규를 봤습니다. 연규를 구하기 위해, 또 연규를 보호하기 위해. 치건은 흔들립니다. 사실 치건은 연규를 본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봤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연규에게 더 눈길이 갔고, 더 관심이 갔나 봅니다. 지울 수 없는 오른쪽 귀의 깊은 상처만큼, 연규의 눈가에 깊게 패인 상흔만큼. 치건은 연규를, 연규는 치건을 통해 서로의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며 ‘명안’이란 괴물의 아가리 속에 위태롭게 전재하는 각자의 과거와 미래를 구원하기로 마음 먹은 듯 합니다. 아니 그래야 했습니다. 치건과 연규는 각자의 ‘화란’이면서 또 각자의 화란(禍亂)을 막기 위해 마지막 고군분투로 가장 슬픈 구원의 서사를 마무리합니다.
 
영화 '화란'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화란’은 장르적 그리고 서사적 나아가 구성적 측면에서 분명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삶의 가장 처절하고 어둡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지점을 감정적으로 치환시켜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폭력적 수위 측면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두어 군데 있지만 반대로 시각화를 고집한 느낌은 없습니다. ‘화란’은 장르적으로 ‘느와르’에 가장 집중하고 감정적으로 ‘느와르’의 동력에 가장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일부 장면을 그렇게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장 집중해야 할 지점은 치건과 연규가 주고 받는 감정 그리고 각각의 인물이 존재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인물을 지배하는 힘을 공감하고 느껴 보는 방법입니다. 치건과 연규의 강가 대화 그리고 정비소에서 밥을 먹던 장면 속 공간을 지배하던 공기의 흐름. 감정의 물결. 두 사람이 채우는 공간과 공간이 집어 삼킨 두 사람의 존재. ‘화란’의 중의적 의미와 표현 나아가 이 세계가 배를 채우기 위해 마구 잡이로 집어 삼킨 희망의 무의미가 너무도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모든 게 ‘화란’이 그려내려 집중한 느와르 그 자체입니다.
 
영화 '화란'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극중 치건의 마지막 선택이 그래서 오롯이 이해되고, 치건의 선택을 결국 받아 들이는 연규의 결정이 ‘화란’의 가장 아프고 슬픈 구원을 완성시킵니다. ‘화란’, 느와르가 만든 두 남자의 서로 다른 희망과 절망의 두 얼굴입니다. 개봉은 다음 달 11일.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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