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용기’, 국어 사전에 나온 뜻.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 어려움 혹은 유무형의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 막는 장벽. 이런 모든 것을 대할 때 우린 ‘용기’가 필요하다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좌절하고 실패해서 무릎 꿇고 포기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용기’가 아닌 절망과 좌절, 그걸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지만 더욱 더 무섭고 두렵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무엇에 결국 무릎 꿇어 버립니다. 바로 체념입니다. 공포 앞에 우린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을 외면하고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 바로 체념입니다. 그저 그 안에서 길들여지고 당연하다 포기하는 ‘체념’. 그럼 모든 게 끝납니다. 결과적으로 ‘용기’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체념하는 당신에게. ‘별 것 아니다’고. 그 두려움, 이해한다고. 다만 그 안에서 길들여지고 포기하지 말라고. 그게 바로 ‘용기’의 반대말 ‘체념’입니다. 영화 ‘용감한 시민’이 그렇게 외칩니다. 오랜만에 등장한 쾌감 300%, 순도 400%, 응원 500%. 지금 체념하는 당신에게 외치는 최고의 응원. 나도 너도 그리고 우리 모두 이미 ‘용감한 시민’입니다.
‘용감한 시민’은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상업영화 외피를 쓴 그릇과 범주, 또 틀 안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카타르시스를 완벽하게 이끌어 냅니다. 권선징악, 그건 현실에선 불가능한 판타지라고.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걸 증명합니다. 하지만 영화만이라도 현실의 옳지 못한 관념을 철저히 부셔 버렸으면 합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말하자면 ‘박살’ 내줬으면 합니다. 그 과정이 우리가 꿈꾸는 방식이기에 또 하나의 관념을 심어 줍니다. 그래서 체념 속에 길들여져 지금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용감한 시민’이 보내는 응원은 아주 강하고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 ‘용감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바른 믿음을 심어줍니다.
영화 '용감한 시민' 스틸. 사진=콘텐츠웨이브(주)
‘용감한 시민’은 동명 원작 웹툰을 바탕으로 보다 영화적으로 각색됐습니다. 무영고등학교를 지배하는 절대악 ‘한수강’(이준영)은 이유가 없는 악인입니다. 그는 성인이 됐지만 여전히 고등학교를 다니는 악인 중의 악인입니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학교를 지배하는 그에게 선생님과 학생들은 그저 장난감일 뿐입니다. 그렇게 학교를 지배하고 학교를 무법천지로 만들어 나가는 한수강에게 고진형(박정우)가 걸려듭니다. 수강 패거리가 진형을 상대로 행하는 폭력은 물리력을 넘어섭니다. 인간성 자체를 말살시킬 정도로 집요합니다. 그들 악행은 무영고등학교 기간제 교사 시민(신혜선)의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영화 '용감한 시민' 스틸. 사진=콘텐츠웨이브감(주)
시민은 학교에선 순응하는 기간제 교사입니다. ‘정교사’ 발령을 위해 ‘봐도 못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을 삶의 방향성으로 삼는 인물입니다. 시민은 이름 그대로 소시민일 뿐입니다. 과거 잘나가던 복싱 유망주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박혁권)의 어려운 사정을 위해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돈을 받고 상대에게 게임을 져주는 선택을 합니다. 현실을 위해 꿈을 포기한 채 삶에 순응하고 체념한 채 살아가는 온전한 소시민.
영화 '용감한 시민' 스틸. 사진=콘텐츠웨이브감(주)
그런 시민의 눈에 수강 패거리 악행은 삶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아이러니한 모멘텀으로 작용합니다. 김밥 할머니에게 끔찍한 짓거리를 자행하는 수강 패거리, 그 할머니의 손자인 진형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수강 패거리. 나아가 수강 패거리 악행을 반대하다 자살한 시민의 전임 기간제 교사까지. 시민은 현실의 순응을 위해 외면하던 자신과 앞으로 나아가던 진취적이던 과거의 자신 사이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일단 그는 가면을 쓰고 정의의 사도가 돼 체념 속에 꽁꽁 숨겨 뒀던 꿈틀대는 올곧은 관념을 끄집어 내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가둬버렸던 자아, 그 정체성이 폭발하면서 시민은 점차 자신이 외면하고 살아왔던 ‘무엇’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눈에 비춰진 진형의 모습에서 스스로가 외면하고 있던 ‘비겁한 자아’를 바라보게 됩니다. 포기하고 무릎 꿇고 두려워할지언정 체념만큼은 거부했던 진형의 모습. 그 모습에 시민은 꽁꽁 숨겨 놨던 ‘진짜 시민’의 모습을 폭발시킵니다.
영화 '용감한 시민' 스틸. 사진=콘텐츠웨이브감(주)
‘용감한 시민’은 학교 폭력, 교권 추락, 갑질 부모, 묻지마 폭행, 약자에 대한 인격 살인 등. 우리 사회가 감추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또 마주하기 싫은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온전히 들춰냅니다. 너무도 적나라한 이 영화 속 현실은 ‘서사적 판타지’가 아닌 ‘존재하는 현실’이기에 더욱 더 보는 이들의 분노를 자아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서사가 흘러가기에 관객들이 느끼는 분노의 수치는 쌓이지 않고 뭉쳐지면서 단단함을 더해 나갑니다.
영화 '용감한 시민' 스틸. 사진=콘텐츠웨이브감(주)
각각의 소재를 풀어가는 서사도 주목해 볼만합니다. 학폭을 통한 교권 추락 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갑질 부모, 그들의 울타리 안에서 자라난 ‘괴물 자녀’의 끔찍함. 궁극적으론 그 괴물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점층적으로 타고 흘러갑니다. 무엇 하나의 문제를 지적하는 게 아닌 우리 사회의 결과론적 행태를 꼬집습니다. 하나의 문제가 그 하나만으로 기승전결을 타고 지적돼야 할 ‘그것’이 아닌 원인을 타고 올라가 시작 자체의 문제를 꼬집으며 진짜 문제, 즉 ‘원인’을 들춰냅니다.
영화 '용감한 시민' 스틸. 사진=콘텐츠웨이브감(주)
원인을 해결하는 방식은 당연히 판타지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머리와 가슴으로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민과 수강의 정면 충돌이 만들어 내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파열음을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가장 간단명료한 답을 도출해 냅니다. 최소한의 기준,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 ‘관념’입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래도 된다’라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극중 수강은 약자에게 ‘그래도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민은 ‘수강에겐 그래도 된다’는 말로 응징을 가합니다. 물론 이 방식이 옳다고 할 순 없지만 영화적 그리고 서사적 판타지안에서 현실의 무성의함을 대변하는 연출의 대답이기에 박수를 쳐줄 수 밖에 없습니다.
영화 '용감한 시민' 스틸. 사진=콘텐츠웨이브감(주)
신혜선은 ‘용감한 시민’을 통해 그동안 보여 준 여성 캐릭터로서의 서사적 한계를 부셔 버리는 쾌감을 제대로 이끌어 냅니다. 힘과 힘의 충돌에서 여성이 가진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며 ‘젠더’란 단어로 구별되는 이분법적 사고를 제대로 깨 버립니다. 최소한 여성 캐릭터의 응징 서사에서 ‘용감한 시민’은 가장 꼭대기에 세워둔다 해도 결코 이견이 나올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풀이와 해석은 이준영이 만들어 낸 절대악 ‘한수강’으로 인해 온전하게 완성됩니다. 국내 상업영화 캐릭터 안에서 이 정도로 앞뒤 서사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악인 캐릭터’는 앞으로 존재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수강의 악행 그리고 정확하게 그 반대에 서 있는 시민의 정의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룹니다.
영화 '용감한 시민' 스틸. 사진=콘텐츠웨이브감(주)
사실 가장 주목해야 할 캐릭터는 진형입니다. 그는 완벽하게 피해자로 규정돼 존재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수강 그리고 시민 두 사람의 자아를 건드리는 모멘텀 그리고 발단입니다. 그를 통해 수강은 더욱 더 스스로의 악을 자극해 나가고, 반대로 시민은 숨겨왔던 진심을 들춰냅니다. 진형은 사실 우리 모두의 자아이기도 합니다. 멈춰 있고 고민하고 때론 체념하고 있을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 그래서 궁극적으로 진형의 마지막 한 마디가 강하게 가슴을 때리며 우리 모두가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완성을 이뤄내고 마침표를 찍습니다.
영화 '용감한 시민' 스틸. 사진=콘텐츠웨이브감(주)
한국형 히어로 장르 대표주자로 내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용감한 시민’입니다. 시민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머물러 버린 선택을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현실을 깨 부수고 나아가는 전진을 택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이름 ‘용감한 시민’, 아마 우리 모두를 향한 응원일 것입니다. 그 응원에 우리가 화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오는 25일 개봉.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