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를 걷다 보면 많은 이들이 백양로와 언더우드관, 윤동주 시비는 찾지만 요업관 뒤편의 작은 언덕까지 올라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그곳에는 오랫동안 잊혀진 무연고 묘 두 기가 자리하고 있다.
1945년은 해방의 기쁨과 동시에 극심한 혼란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일제는 물러났지만 새로운 국가 체제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고, 서울 곳곳에서는 행정권과 치안권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다. 연희전문학교 역시 일제에 의해 폐교와 강제 개편을 겪은 뒤 가까스로 재건을 시작하던 때였다. 학생들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열망 속에서 자치활동과 사회 참여에 적극 나섰다.
연세대 기록물에 남아있는 얼마간의 정보와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해방 직후 혼란기인 1945년 가을, 그 자치 활동의 일환으로 아직 일제 경찰의 영향력아래 부역하던 친일 잔당들이 경찰서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을 바꾸러 나섰다가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연희전문학교 학생 두 명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전해져 왔다.
그들은 결국 귀가하지 못했다. 가족을 찾지 못한 채 학교 인근에 묻힌 그들의 묘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름조차 희미해졌다. 무덤은 남았지만 정확한 기록과 안내판은 부족했고, 존재를 아는 사람도 극소수에 그쳤다.
1945~1948년 해방정국의 대학생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캠퍼스 생활"과는 매우 달랐다.
우선, 배고팠다.
해방 직후 조선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쌀은 부족했고 물가는 폭등했다. 대학생 상당수는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어려웠고, 지방 출신 학생들은 하숙집을 전전하거나 친척집에 얹혀 살았다. 미군정 보고서에도 대학생들이 기숙사 부족, 생활비 상승, 교재 부족에 강한 불만을 가졌다는 기록이다.
둘째, 학교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광복 직후 미군이 학교 건물을 사용하면서 수업이 중단되거나 축소되는 경우가 많았다. 해방 직후 고등교육기관들은 재개교 과정에 있었고 교실, 교재, 교수 모두 부족했다. 1946년 초가 되어서야 대학들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셋째, 일본군·학병 출신 학생들이 캠퍼스로 돌아오고 있었다.
1944년 이후 많은 조선 청년들이 학도병, 지원병, 징병 형태로 일본군에 끌려갔다. 해방 후 살아남은 이들은 군복을 벗고 학교로 복귀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중국, 동남아, 일본 본토에서 군 생활을 하던 청년들이 다시 강의실에 앉은 것이다. 이들은 보통 20대 초반이 아니라 20대 중후반인 경우도 많았고, 전쟁을 경험한 만큼 정치와 사회 문제에 매우 민감했다. 해방 직후 학생운동이 유난히 격렬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런 세대적 경험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생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학생들은 오히려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 나라가 막 생기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기에는 대학가에서 파업과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경찰 개입 문제를 둘러싼 충돌도 빈번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나라를 세울 세대'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대학생이 취업을 고민한다면, 1945년의 대학생은 국가의 방향 자체를 고민했다. 독립운동가가 되려 했던 선배들을 보며 자랐고, 해방을 직접 경험했다. 당시 학생들의 회고록에는 "수업보다 정치 토론을 더 많이 했다"는 증언이 반복된다.
그래서 만약 요업관 뒤 두 학생이 실제로 해방정국의 충돌 속에서 희생된 것이라면, 그들을 단순한 사고 희생자로 보기 어렵다. 요업관 뒤 두 무덤은 단순히 두 청년의 묘가 아니라, 해방정국을 살았던 한 세대 전체를 상징하는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연세대학교는 교내 역사 보존 사업을 통해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 역사를 정리해 왔지만, 요업관 뒤 두 학생의 묘는 상대적으로 관심 밖에 머물러 있었다. 학교 역사 자료와 연표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의 굵직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두 학생의 희생은 공식 역사 속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최근 들어 동문은 연세대 학생운동사를 다시 정리하고 있고 역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오는 2026년 9월 9일에는 두 학생을 추모하는 위령비를 세우려는 움직임도 추진되고 있다. 위령비 건립은 단순한 기념사업이 아니다. 해방의 격동기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청년들의 삶을 공동체의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다.
81년의 세월이 흘렀다. 요업관 뒤 언덕의 두 무덤은 여전히 조용하다. 그러나 위령비가 세워지는 날, 그곳은 더 이상 이름 없는 무덤이 아니라 해방기의 혼란 속에서도 더 나은 나라를 꿈꾸었던 젊은이들의 흔적을 기억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역사는 거대한 영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평범한 청년들의 희생이 오늘의 대학과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두 기의 무덤이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