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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어주는기자)이념에 묻힌 ‘한 조각’ 삶, 그것이 ‘역사’다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정찬대 지음|한울아카데미 펴냄
2017-11-03 15:07:51 2017-11-03 15:47:02
[뉴스토마토 권익도기자] 개인의 ‘한 조각’ 삶은 때론 진실이 된다. 그것은 승자들이 직조한 편집적 ‘역사’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지고 묻혀질, 그래서 꼭 다뤄야만 할 약자들의 이야기다. 우리가 새롭게 세워야 할, ‘정의’라는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의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호남·제주편)’는 역사의 그런 특성을 정확히 파고 드는 책이다. 그간 통사에 묻혀 온 한국 근현대사,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에 포커싱을 맞춘다. 좌우 이념 대립 속에 개인이 도구화되고 인간 존엄이 철저히 파괴된 당시의 질곡을 끊임없이 훑어나간다.
 
“한 많은 이 세상 좌와 우에 이유 없이 영문도 모르고 죽임을 당한 임이시여. 가해자와 피해자 너와 나 낡은 구별은 영원히 사라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만 가득하리오.(2006년 전남 영암 구림에 세워진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 비문 중)”
 
책은 저자의 고향이기도 한 전남 영암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이곳은 한국전쟁 시기 도망이 용이하고 주변 6개 시·군과 인접해 있던 까닭에 이념 대립이 극심했다. 그 속에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스러져간 넋들은 무고한 주민들이었다.
 
저자는 2014년 영암 냉천마을에 현재 거주중인 김한기씨를 만난다. 그는 1950년 12월18일 북한군을 토벌하던 군경의 집단학살로 가족을 잃는다. 당시 큰 누나와 작은 누나, 이웃들과 함께 이끌려간 곳은 동네 어귀였다. 기관총 소리와 함께 일제히 사람들이 고꾸라졌고 큰 누나는 김씨를 재빨리 치마폭에 감싼 채 엎드렸다. 그는 큰 누나의 품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트럭에 두 아들이 타고 있었지.” 나춘자씨는 그의 외이종할아버지로부터 보도연맹 사건의 참상을 그대로 전해들었다. 영암에 일보고 금정면 토동마을의 집으로 돌아가던 외이종할아버지는 트럭 세 대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한다. 거적 같은 포장을 씌운 차량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금정면으로 향했다. 며칠 뒤 그는 당시 차량이 보도연맹원을 태운 트럭임을 알게 된다. 거기엔 이름 석자만 쓰면 식량을 준다는 말에 무고하게 강제로 가입된 이웃들이, 그리고 두 아들이 타고 있었다.
 
여순 사건, 제주 4·3 사건 역시 이를 직접 겪은 이들에겐 여전히 크나큰 트라우마다. 당시 문순선씨와 그의 가족들은 ‘좌익’ 프레임을 씌운 서북청년단에 의해 고문을 당한다. 특히 당시 그들은 임신중이었던 문씨의 배에 널빤지를 올린채 널을 뛰는 행포까지 부렸다. “잘못했수아, 잘못했수아. 이번 한 번만 살려줍수아” 배를 움켜잡고 애처롭게 울부짖던 당시 문씨의 통곡은 책에 그대로 실려 있다.
 
칠순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른 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한 노인, 집단 학살지에서 누구의 유골인지도 모를 뼛조각을 부여잡고 한없이 통곡하던 한 유족, 난자당한 부모님을 지켜보며 그저 목숨하나 부지해야 했던 비참함에 평생 죄인처럼 살아온 어떤 이. 그렇게 책은 ‘사람’과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책의 추천사를 맡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년 전 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왜 ‘학살’에 꽂혔나는 나의 물음에 정찬대 기자는 ‘아무도 안하니 내가 하겠다’는 답을 했다”며 “’학살’을 대하는 젊은 기자의 진지한 모습에 대견하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 ‘복원력’은 바로 이런 생각과 따뜻함을 지닌 이들에게서 나오는 법이다”라고 평했다.
 
저자는 이번 제주, 호남 편을 시작으로 본다. 다른 지역의 학살 기록도 취재할 예정이다. 다만 그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을 쓰면서도 이미 여러 통의 부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애달픈 꽃’처럼 살다간 이땅의 넋을 위해 그는 조바심을 내며 이 미완의 글을 계속 완성해갈 계획이다.
 
지난 7월 충북 보은문화원에서 6·25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 합동추모제가 열린 모습. 사진/뉴시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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