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서울재즈쿼텟 “성성한 백발로 꿈 이뤄”
27년 만에 재결성 무대…내년 안으로 앨범도 계획
“20대 때 도전 대상이던 재즈…60대엔 삶의 동반자”
2022-06-15 16:00:00 2022-06-20 14:23:57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응규, 희현 두 형님이 리듬을 딱 받쳐주고, 준호씨가 멜로디로 확 감싸주는데, 우리의 그 20·30대 열혈 재즈 청춘이 눈앞에 펼쳐지더라니까. 입에 악기를 대기만 해도 그냥 소리가 나는 기분인거야.”
 
척하면 착 하고 받는 ()의 대화가 세월을 거슬러 갱생(更生)한다. 1990년대부터 한국재즈계의 중흥기를 이끈 색소포니스트 이정식(62) 주축의 서울 재즈 쿼텟원년 멤버들, 김희현(드럼·72), 장응규(베이스·69), 양준호(피아노·59)가 27년 만에 재결성 무대를 앞두고 있다. 오는 18일 재즈평론가이자 작가인 남무성이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음악바 가우초에서다.
 
이미 두 번의 리허설을 마쳤다는 이정식을 13일 서울 서초구 과천대로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남무성씨가 맨날 같은 편성 말고 새로운 걸 해보자며 제안한 아이디어로 이번 공연이 성사됐다. ‘백발이 성성해도 옛 얘기 해가면서 무대에 서는 게 재즈인이지하며 껄껄 웃던 우리 옛 바람이 이뤄져 기쁘다며 파안대소했다.
 
서울재즈쿼텟 원년 멤버들, 이정식(왼쪽부터), 양준호, 장응규, 김희현. 사진=서울재즈쿼텟
 
서울재즈쿼텟 원년 멤버들은 한국 재즈 불모지시절인 1980년대 초반 활동(실제 결성과 활동 기간은 1989~1993년 사이)을 시작했다. 당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였던 김희현, 60~70년대 그룹사운드 김혜정과 검은 장미’(전신 검은나비) 등에서 활동한 장응규가 동시에 몸담고 있던 KBS 악단의 빈 사무실에서 놀듯 연주한 게 결성 단초다. 성인 가요와 트로트 뽕짝이 넘쳐나던 당시 재즈는 약세였다. “80년대는 미 8군 중심으로 재즈가 성행했던 60~70년대보다도 상황이 심각했어요. ‘재즈하면 굶어죽는다는 게 당시 음악 하던 사람들의 의식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들은 반골이었다. 재즈에 푹 빠졌다. 각자의 활동이 있음에도 치열하게 뭉쳐 연주했다. “(3년 뒤) 누군가 해체하자, 그만하자는 말을 꺼낸 건 아니에요. 서로의 삶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중단됐고 20여년이 흘러 버린 거죠. 이렇게 다시 재즈를 구심으로 만난 게 소중해요. 이제는 쭉 가지 싶어요.”
 
이번 공연에서는 6~7곡을 한 세트로 묶어 총 2세트를 연주한다. ‘all the things you are’ 같은 정통 스윙부터 ‘feel like making love’, ‘Just the Two of Us’, ‘Dark eyes’ 같은 재즈 스탠더드들을 들려줄 예정이다. 1997년 이정식이 뉴욕에서 론 카터(베이스), 케니 배런(피아노), 루이스 내쉬(드럼), 히노 테루마사(트럼펫) 등 재즈 거장들과 녹음한 앨범 수록곡 고향으로 가는 길(Underway Hometown)’, ‘뱃놀이 변주곡도 연주한다.
 
관악기의 금빛 통 안에서 뿜어지는 경조(京調)에 가까운 시김새 선율, 그러나 재즈적 화성을 뼈대에 둔 음의 곡선이 자욱한 안개의 수묵담채 같은 미학으로 무대를 물들인다. 장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어서는 재즈의 진경을 펼쳐낼 작정이다.
 
한국 재즈계 1.5세대이자 대표 색소포니스트 이정식(가운데). 사진=문화체육관광부
 
거의 30여년 만에 모이다보니 처음엔 서로 너무 조심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아니,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우리 안에 잠재된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거 다 보여줄 수 있게 하자’. ‘너무 내면으로 숨기지 말고 내뱉자, 거칠어도 좋다.
 
한국의 케니 지, 그러나 이정식 만의 표현형식과 즉흥 테크닉은 독창적으로, 세계적 수준이라 평가받는다. 90년대 가요 명곡들에 참여한 한국의 대표 색소폰 명장. ‘대한민국의 기타가 함춘호라면 그는 대한민국의 색소폰이다. 이승철의 솔로 데뷔곡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서태지와 아이들의 1~4집 음반과 라이브(이제는’, ‘굿바이), 듀스의 여름 안에서. 음의 금빛 지류는 최근 앨범 으로 세계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오공 등 신예 뮤지션에게까지 닿고 있다.
 
색소폰은 주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따뜻한 악기입니다. 재즈 역사에서도 달콤한 소리가 많은 사랑을 받았죠. 존 콜트레인의 발라드 음반, 캐논볼 애덜리의 알토 색소폰을 들어보세요. 한편으로 팝이나 가요에서는 까랑까랑하죠. 변화무쌍한 매력이 있어요.”
 
1990년대부터 한국재즈계의 중흥기를 이끈 색소포니스트 이정식(62) 주축의 ‘서울 재즈 쿼텟’ 원년 멤버들, 김희현(드럼·72), 장응규(베이스·69), 양준호(피아노·59)가 27년 만에 뭉쳤다. 사진=가우초
 
이번 공연은 전초전에 가깝다. 올해 가을 콘서트홀 규모에서 정식 출사표를 던질 예정이다. 멤버들 각자 미발표 창작곡들을 모아 늦어도 내년 안에 앨범까지 낼 계획도 있다. “한 곡 정도는 아방가르드-프리재즈를 녹음해도 괜찮지 않나 생각하고 있어요. 3분을 초시계로 맞춰놓고 바다라는 이미지를 던지고 각자의 상상을 연주를 녹음하는 거죠. 이번 공연 준비로 깨달았어요. 이미 서울재즈쿼텟 만의 아이덴티티가 있다는 걸.”
 
재즈를 시작하던 시기 23살이었다는 그는 당시 재즈란 내가 파고들어야 할, 도전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동반자 같은 느낌이라며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노년의 부부처럼 이제 재즈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번 서울재즈쿼텟 재결성과 이번 공연을 지중해 같은 공간에 비유했다.
 
리허설 때 연주가 굉장히 거칠고 끈적한 느낌이면서도 한편으론 드럼과 베이스 리듬이 굉장히 산뜻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거든요. 약간의 열기가 있고 덥지만, 그늘에만 들어가면 상쾌한.”
 
한국 재즈계 1.5세대이자 대표 색소포니스트 이정식. 사진=뉴시스
 
<에필로그: 이정식, 색소폰, 48년, 그리고 서울재즈쿼텟>
 
-'서울재즈쿼텟' 하면 생각나는 장소가 있나요. 특정 장소에서 여행 인터뷰를 했다면 어디가 제일 좋았을까요.
 
KBS 악단 사무실과 함께 기억나는 곳은 방배동에 ‘파블로’라는 재즈클럽이었어요. 거기서 남무성씨가 이른바 ‘판돌이’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우린 공연을 했었죠. 그 활동이 조금씩 커지면서 이태원 재즈클럽 ‘올댓재즈’로 넘어가게 됐고, ‘서울재즈쿼텟’이란 그룹이 결성된 것이고요. 80년대 재즈는 비주류라 우리를 신기하게 보긴 했지만 반응이 좋았어요. 호암아트홀,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무대에 다 섰고 지방 투어도 돌았죠. 당시는 재즈 밴드로 그렇게 서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그때는 젊어서 그 무대들이 귀한지 몰랐던 것 같아요. 지금 다시 모여 보니 그 무대들의 소중함을 알 것 같아요.
 
-한국 재즈음악계의 1.5세대 연주자이자 14살 때부터 색소폰을 불기 시작해 올해로 48년째이십니다. 그리고 90년대 거의 모든 대중음악에 색소폰 연주를 담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승철, 서태지, 신해철, 김건모, 긴현철, 이승환... 보통 가요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고, 어떤 기억들이 있으신지요.
 
보통은 기획사에서 먼저 연락이 오고 아티스트로부터 어떤 음악인지 설명을 듣습니다. 색소폰 연주 파트의 경우 따로 악보가 없지만 곡의 전체 분위기를 들으면서 핵심 화성을 그리고 즉석에서 느낌에 맞게 멜로디를 연주하게 됩니다. 처음 레코딩 세션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이승철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간주 파트였고, 그 곡이 유명해지면서 색소폰 매력이란 것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1980~1990년대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굉장히 발전했는데, 저를 비롯한 재즈 연주인들은 재즈 화성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90년대에는 퓨전 음악을 배운 유학파들이 뛰어들면서, 르네상스가 오고 있었죠. 그 전까진 성인가요와 트로트일색이었으니까.
 
-특히 올해는 서태지 데뷔 30주년이기도 해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부터 4집까지 라이브와 음반 모두 색소폰을 담당하셨습니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음반이 뜨는 바람에 저 역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던 게 사실이죠. 1집이 히트가 되고 나서, 저도 라이브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러 갔는데, 며칠 간 리허설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와, 이 친구가 음악적 욕심이 대단하네’ 생각하면서 들어갔는데 직접 하는 리허설을 보니 혼자만 지치질 않아요. 우리는 ‘이 정도면 완벽한데’ 하고 생각해도 계속해서 다시 해보고 싶다, 말하더라고요. 제 기억으로는 굉장히 순수했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게 있던 친구였어요. 당시 연습 도중 주변 관계자들이 만원 권을 주면 어찌나 그렇게 소년처럼 해맑게 웃던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하하.
 
-가요에서 쓰는 색소폰 주법과 재즈에서 쓰는 주법이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가요나 팝은 비브라토 같은 잔재주나 기교 같은 것들이 많이 들어가게 되고요. 재즈는 정교함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가령 가요가 ‘아~’ 한다면 재즈는 ‘아, 아, 아’ 하는 절제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는 차이가 있죠. 사실은 음악이 깊어질수록 절제하는 게 더 어려워요. 색소폰이라는 악기의 활용은 정말 다채로워요. 처음에는 유럽 벨기에에서 클래식을 위한 악기로 만들었는데, 대접을 못 받은 거죠. 고풍스러운 느낌이라기 보다는 굉장히 크고 선정적인 사운드였으니까. 근데 그게 주법에 따라 따뜻한 느낌으로 느껴질 때도 많아요.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1920-1930년대 자유분방한 재즈 음악에도 잘 묻어나왔죠.
 
한국 재즈계 1.5세대이자 한국 대표 색소포니스트 이정식.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외국 재즈 거장들을 레코딩 세션으로 섭외한 <이정식 인 뉴욕, 1997> 앨범은 한국 재즈계의 새로운 선례를 개척한 사례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작업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나요.
 
국내 연주자가 외국 재즈 뮤지션, 미국 재즈 히스토리에 나오는 아티스트들과 연주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때였죠. 제가 연주한 녹음본을 카세트테잎에 담아 갖다 주면서 이 정도 연주하는데 해줄 수 있냐 물어봐서 시작된 작업이었어요. 마침 그분들도 듣도 보도 못한 ‘코리안 재즈가 왔다. 우리가 미국 현지에 코리아 재즈 메신저가 되겠다’며 승낙하셨습니다. 그때 피아니스트 캐니 베론이 제가 작곡한 ‘고향가는 길’의 한국적 멜로디가 인상적이라며 이런 곡을 써줄 수 있겠냐고도 요청했었고요. 녹음 당시에는 완숙한 연주와 동시에 대가들의 겸손함이랄까, 제게 정말 편안하게 해주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 재즈 1세대. 신관웅(피아노), 김수열(색소폰), 이판근(베이스), 박성연(보컬) 등의 연주자들의 존재는 선생님께 어떤 의미를 남겨주셨나요.
 
1세대 어르신들은 어쨌든 우리나라 재즈계에 씨앗을 뿌려주신 분들이고, 그 씨앗에서 우리가 피어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참 순수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정말 재즈 밖에 모르고 사신 분들이죠. 제게는 음악적으로도 배울 점이 많았지만 그분들의 소박하고 소탈한 삶, 오직 재즈만 아는 삶으로부터 자세를 배울 수 있었고 지금도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어르신들처럼 ‘내 주위 동료들 함께 보듬어서 함께 나아가야겠다’, ‘같이 재즈 속에서 인생을 향유하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서울재즈쿼텟’을 다시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서울재즈쿼텟의 다른 원년 멤버분들도 교육 등 각자의 영역에서 재즈문화에 기여해왔다고 봤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활동을 이어갈 것 같으신가요.
 
양준호씨는 수원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요. 김희현 선생님은 본인의 아카데미에서 드럼스쿨 하고 계십니다. 장응규 선생님은 현재도 가수 세션 콘서트에서 계속 연주하고 계세요. 각자의 생활을 존중하면서 나가려고 합니다. (서울재즈쿼텟에) 크게 욕심은 안내고요. 이제는 얼마만큼 오래 함께 할 수 있는지 그게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원스인어블루문, 올댓재즈 같은 상징적인 재즈공간들이 무너졌는데, 이런 소규모 무대라도 연주자들에게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다시 일어서야죠.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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