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18일 저녁 6시 50분, 잠실 하늘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자, 모래 시계가 금빛 모래 줄기들을 아래로 내쏟기 시작했다. 아이유(이지은·29)와 유애나(팬덤명)의 시간이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그림자 없이 함께 춤을 춰'('에잇')
10분 뒤인 7시 정각, 공중 무대 장치 위 실루엣 속에서 부드러운 미성의 음색이 흐르자, 4만개의 아이크(아이유 응원봉)에서 오렌지 빛이 일렁거렸다.
"3년 만에 공연으로 여러분께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리게 된 아이유입니다. 반갑습니다. 어제보다 살짝 더웠는데 괜찮았나요? 그런데 다행히 어제보다 하늘이 좀 예뻤어요. 더워서 고생하실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래도 노을 질 때 석양질 때 '에잇'을 부르고 싶었거든요. 오래 전에 기획했던 대로, 하늘이 예뻤던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17~18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가수 아이유의 단독 콘서트 '더 골든 아워(The Golden Hour) : 오렌지 태양 아래'. 국내 여성 가수 최초로 '꿈의 무대'로 통하는 잠실 주경기장에 입성했다. 사진=EDAM엔터테인먼트
국내 여성 가수 중 처음으로 '꿈의 무대'에 선 아이유는 초가을 해질녘 정취까지 공연의 미장센으로 활용할 정도로 남달랐다.
이날과 전날,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는 아이유의 단독 콘서트 '더 골든 아워(The Golden Hour) : 오렌지 태양 아래'가 열렸다.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은 일반 좌석으로 4만여 이상(스탠딩석 포함하면 최대 10만 명)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무대로, 가수들에게 '꿈의 무대'라 불린다.
그간 조용필, 서태지, H.O.T., 싸이, 방탄소년단(BTS) 등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가수들이 입성해왔다. 해외 팝스타 중에서는 마이클 잭슨, 폴 매카트니, 콜드플레이 등 전설적인 음악가들이 서왔다. 해외 여성 가수 중에는 2012년 레이디 가가가 공연했다. 아이유는 국내 여성 가수 중에서 처음으로 올림픽주경기장 무대에 서는 기록을 쓰는 동시에 가가 이후 10년 만에 이곳에서 단독으로 공연하는 여성 가수가 됐다. 이번 공연으로 양일간 주경기장엔 9만여명의 관객들이 몰렸다.
당초 이 공연은 지난 2020년 기획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무산됐었다. 그러나 데뷔 14주년(데뷔일 2008년 9월18일)이자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살을 맞이한 올해 재추진했다.
17~18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가수 아이유의 단독 콘서트 '더 골든 아워(The Golden Hour) : 오렌지 태양 아래'. 국내 여성 가수 최초로 '꿈의 무대'로 통하는 잠실 주경기장에 입성했다. 사진=EDAM엔터테인먼트
이날 아이유의 무대는 기록 뿐만 아니라, 연출 면에서도 대중음악사에 또 하나의 페이지를 열 만한 공연이었다. 2014년 서태지가 9집 '콰이어트 나이트'로 컴백할 당시, '소격동'을 함께 부르고 '숲속의 파이터' 같은 동화 콘셉트의 무대 연출을 경험해온 그다.
당시 21세에서 이제 30살이 된 아이유는 이제 자신의 공연을 건축할 줄 안다. 자신이 관통한 세계를 봄 내음 가득 머금은 라일락의 향기나 숫자로 그려내던 가삿말처럼.
'에잇'부터 'Celebrity', '이 지금', '하루 끝'까지 대표곡들이 흘러나올 때 마다, 거대한 LED 화면에는 그림책 같은 분홍색이나 보랏빛 일러스트가 반짝거렸다. 기타와 건반, 드럼, 퍼커션, 베이스 등 라이브 연주자와 수십명의 안무팀들이 원곡을 펄떡이는 생동감으로 바꿔놨다.
이날 공연의 최대 전환점은 초중반 배치된 곡 'Strawberry moon' 전후 때 순서. 파도가 아이에게 "온통 너의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동화책처럼 속삭인 후(VCR 영상, 아이유 나레이션), 아이유가 직접 탄, 붉은 달 형상의 거대 열기구가 주경기장 위로 날아오르는 서사와 역동의 연출이 특기할 만 했다.
17~18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가수 아이유의 단독 콘서트 '더 골든 아워(The Golden Hour) : 오렌지 태양 아래'. 국내 여성 가수 최초로 '꿈의 무대'로 통하는 잠실 주경기장에 입성했다. 사진=EDAM엔터테인먼트
삶이란 언제나 일정 페이지가 넘어가면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리는 것이다. 30대의 출발점에 선 아이유 역시 음악 인생의 새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팔레트'와 '좋은 날'을 "이번 공연에서 졸업하게 될 곡들"이라 했다.
'팔레트' 때는 "이제 25살의 지은이에게 남겨주고 당분간 공연장에서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좋은 날'에 앞서도 "18살 때 불렀던 노랜데 이제는 오빠들이 많이 없어지기도 한 것 같고(웃음), 이제 막 생긴 초등학생 팬들의 경우는 이 노래를 모르는 경우도 많더라"고 했다. "늘 3단 고음을 하고 퇴장하는 뻔한 형식의 공연을 이제는 탈피하고 싶어서요. 당분간 셋리스트에 포함시키지 않을 예정입니다." 곡을 부르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18살 된 것 같았다"며 눈시울을 살짝 붉히는 모습도 보였다.
산울림 김창완의 '너의 의미'를 부르고, 율동을 춰가며 소방차 '어젯밤 이야기'를 부를 때. "아이유는 국힙(국내힙합) 원톱이 아니고 그냥 원톱"이라며 추켜세운 이날 게스트 박재범과 협업곡 'GANADARA'을 선보일 때 아이유의 유려한 미성 고음은 한국 대중음악 장르와 세대를 통합했다.
3부 '무릎'부터는 40여 오케스트라 단이 함께 무대에 올라 아이유의 음악 세계를 확장시켰다. '겨울잠', '나만 몰랐던 이야기' 같은 대표곡들까지 스펙트럼을 넓힌 웅장한 현악의 소리들은, 아이유 형상을 그려내는 수백 대의 드론 불빛과 대형 폭죽이 맞물리며 현장 분위기를 뜨거운 축제로 달궜다.
후반 바이올린 연주자의 독주와 오케스트라의 합주, 수십명의 안무 단원들, 마법처럼 동그랗게 말아 올라가는 폭죽으로 재탄생한 '시간의 바깥'은 동화에서 뮤지컬 단계의 연출로 넘어가며, 광활한 페이지를 열 아이유의 새 음악 세계를 기대하게끔 했다. 앙코르 곡 'Love poem'을 들으며 빠져나오는 길, 주경기장 인근에는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수백명의 10~20대들이 돗자리를 깔고 진을 치며 듣고 있었다.
삶의 시와 노래가 누군가에게는 생의 기록이 될 것이다. 아이유의 '오렌지빛 서른'이 이제 출렁이기 시작했다.
17~18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가수 아이유의 단독 콘서트 '더 골든 아워(The Golden Hour) : 오렌지 태양 아래'. 국내 여성 가수 최초로 '꿈의 무대'로 통하는 잠실 주경기장에 입성했다. 사진=EDAM엔터테인먼트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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