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4월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브리핑룸에서 추가 내각 인선 발표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 윤 당선인.(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김광연 기자] 책임총리제를 표방했던 한덕수 국무총리가 '바지 총리', '신문 총리'로 전락했다. 영빈관 신축 예산 등 주요 현안조차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고 실토하면서 조롱은 여당 내에서도 쏟아졌다.
19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대정부질문은 한 총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장이 됐다. 한 총리는 여야 의원들로부터 쏟아지는 질의에 제대로 된 답변보다는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태도로 논란을 키웠다. 특히 첫 날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예산만 878억원이 책정된 대통령실의 영빈관 신축 문제를 "몰랐다. 신문을 보고 알았다"고 답해 졸지에 '신문 총리'가 됐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달 30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앞서 한 총리는 지난달 30일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영빈관 신축 비용을 포함한 639조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확정, 의결했다. 당시 예산안 관련해 "최근 수년간 지나친 확장적 재정 운용으로 우리나라의 국가 채무가 지난 5년 사이 400조원 이상 증가해 올해 말 약 1070조원에 이를 전망"이라며 "우리 미래 세대에게 빚더미인 나라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한 총리는 20일 외교·통일·안보 대정부질문에서 김병주 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중순 대통령 헬기가 (대통령실 청사에)내리다가 꼬리 날개가 손상된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또 다시 "신문에서 봤다"고 답했다. 하지만 대통령 헬기 사고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조문이 불발된 것과 관련해 "박진 외교부 장관은 어디에 있었느냐"는 김 의원의 추궁에 한 총리는 "글쎄, 대통령을 모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박 장관은 미국에서 외교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20일 MBC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끔찍한 발언"이라며 "국무총리가 800억원가량의 예산 사용 요청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본인이 허수아비라고 생각해서 한 말인지, 아니면 문제가 되니까 책임을 실무자한테 떠넘기려고 하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오영환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21일 "한 총리가 '신문 총리'의 면모를 보였다. 정말 무책임하다"며 "국정상황을 총괄하는 총리가 이렇게 안일하게 답할 수는 없다"고 한탄했다.
심지어 여권에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김재원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21일 C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관여한 적이 없고 묻지 마세요. 저는 관여하기도 싫어요'라는 표정"이라며 "왜 총리를 하시는지, 언론에 보니까 바지 총리는 아니고 식물 총리라는 말이 나온다"고 꼬집었다. 김근식 전 국민의힘 비전전략실장은 같은 날 MBC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전체적인 대통령 순방 외교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교부 장관이 어디에 있는지를 총리가 모른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 총리는 지난 정부마다 요직을 거친 정통 관료 출신이다. 김대중정부에서 경제수석을 지냈고, 노무현정부에는 경제부총리와 국무총리, 이명박정부에서는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이던 지난 4월 한 총리를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하자 보수 정부의 호남 출신 총리라는 점에서 통합 리더십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됐다. 윤 대통령도 당시 "정파와 무관하게 오로지 실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국정 핵심 보직을 두루 역임하신 분"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여기에 윤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공약한 책임총리제 실현 여부도 관심거리였다. 책임총리제는 총리가 내각을 실질적으로 틀어쥐는 사실상의 분권형 국정운영 체제다. 한 총리 역시 지명 직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대통령은 중요한 국정 과제를 담당하고, 총리와 각료가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받아 각 분야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한 총리는 책임총리는커녕 존재감조차 미미하다. 윤 대통령의 주도권이 강해 책임총리제 구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말들도 흘러나왔다. 김두수 시대정신연구소 대표는 <뉴스토마토>와의 통화에서 "임명 당시만 해도 책임총리라 강조했지만, 대정부질문을 보면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며 "마치 자리에서 내리려면 내리라는 태도"라고 해석했다.
김광연 기자 fun35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