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네오위즈의 게임 'P의 거짓'의 주인공 피노키오(P)는 자동인형, 즉 AI(인공지능) 로봇입니다. 그런데 이 AI 피노키오는 '인간성'을 얻기 위해 모험을 계속하는데요. 눈에 띄는 점은 인간성을 얻는 과정에서 '죽음'과 '음악'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되려는 피노키오를 조명하기 위해 카를로 콜로디 원작 '피노키오의 모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피노키오', 피노키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진 영화들을 두루 톺아봅니다.
소피아의 염원을 담은 파란 나비 모양 에르고가 피노키오에게 날아와 앉았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파란 요정의 나비, '영원한 영혼' 상징
소울라이크 장르인 P의 거짓의 핵심은 반복되는 죽음입니다. 본격적인 동화 이야기에 앞서, 피노키오의 반복된 죽음이라는 설정을 뒷받침하는 장치 '에르고'에 담긴 의미를 읽어보겠습니다. 게임을 시작할 때 피노키오 동력원인 에르고가 파란 나비 모양으로 날아오는데요. 이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프시케(Psyche)'를 연상시킵니다. 프시케는 그리스어로 '나비'와 '영혼'을 뜻하고 '영원한 영혼'을 상징합니다. 프시케와 철자가 같은 영어 '사이키(psyche)'는 영혼과 정신을 뜻하지요. 불교에서는 알에서 나비가 되는 과정을 인간의 윤회에 비유합니다. 기독교에선 죽은 듯한 고치로 자신을 감싼 유충이 나비로 태어나는 모습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나비는 동서양 신화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고난을 극복하는 상징으로 쓰여왔습니다. 한국 전설에도 죽은 연인을 그리워한 여인이 님의 무덤에 뛰어들며 나비로 환생했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야기 중심 무대가 되는 크라트 호텔에서 피노키오의 성능 개선을 돕는 '소피아'는 가슴에 파란 나비 브로치를 달고 있습니다. 동화 피노키오 속 파란 머리 요정의 역할을 하는 만큼 이 게임에서도 머리 색이 파랗습니다. 피노키오가 사망할 때 떨구는 에르고 주위에도 파란 나비가 날아다닙니다.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걸 표현하는 듯한 모습인데요. 피노키오는 이렇게 재생의 조건을 가득 안고서 죽음을 거듭하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피노키오는 원작 동화에서도 죽은 적이 있답니다. 원작을 쓴 카를로 콜로디는 1881년 이탈리아 최초의 어린이 잡지 '소년 신문(Giornale per I bambini)'에 '피노키오의 모험'을 연재했는데요. 15장에서 피노키오가 고양이와 여우 강도에 의해 떡갈나무에 목 매달린 채 죽는 결말을 내 버렸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거센 항의로 담당 편집자가 콜로디를 설득해 계속 작품을 쓰게 했지요. 이후 연재가 2년간 이어졌고, 파란 요정에 의해 살아난 피노키오가 마지막 36장에서 인간 소년이 되는 결말로 끝납니다.
작가가 비록 독자들의 항의에 따라 주인공을 살렸지만, 이후 피노키오는 번번이 죽음에 내몰리게 됩니다. 모두가 게으름을 피우는 마을에 수개월 머물다가 당나귀가 되어버려 팔려간 뒤 바다에 빠져 물고기들에게 피부를 뜯기기도 하고, 상어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그 시대 아동 문학은 이면의 의미가 꽤나 현실적이어서 잔인하고도 슬픈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 많았다고 하지요.
이후 철이 든 피노키오는 근면성실해지고 아빠에게 효도하는 아들이 되어, 파란 요정의 축복을 받고 인간 소년이 됩니다.
영화 'A.I.'에서 11살짜리 소년 로봇 데이빗은 자신을 버린 엄마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파란 요정에게 인간 소년이 되게 해 달라고 빈다. (사진=다음 영화)
영화에선 '죽음'으로 인간의 삶 완성
기예르모 감독의 스톱모션 영화 피노키오에서는 피노키오가 죽었다 깨어나기를 수차례 반복한다는 면에서 P의 거짓과 닮았습니다. 영화 속 피노키오는 처음엔 죽음을 가볍게 여깁니다. 사후 세계에서 모래시계 바닥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면 계속해서 다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가 소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인 까닭에 탁자나 의자처럼 생명이 없어 진정으로 죽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는 P의 거짓 속 자동인형 피노키오가 죽음을 반복해도 어색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 속 피노키오가 죽을 때마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집니다. 2차 대전 이탈리아 소년병으로 징집돼 아빠와 헤어진 피노키오는, 우여곡절 끝에 바다 괴물 뱃속에서 아빠를 상봉합니다. 이후 피노키오는 아빠를 탈출시키기 위해 괴물의 입에 걸린 수뢰를 터뜨리며 죽음을 택합니다. 이후 곧바로 바다에 빠진 아빠를 구하려는 계획이었지만 모래시계 바닥은 더디게 쌓입니다. 피노키오는 결국 모래시계를 깨부수고 영생을 포기합니다.
결국 피노키오는 바다 깊이 빠진 아빠를 구하고서 죽습니다. 모래시계를 깨부숨으로써 인간 아이로 거듭난 피노키오는 이제 예전처럼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제페토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파란 요정은 피노키오를 되살릴 수 없다 말하지만, 피노키오를 따라다니던 귀뚜라미가 히든카드를 내밉니다. 피노키오를 착한 아이로 만들면 대가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냐며 피노키오의 부활을 요구합니다.
다시 한 번 생을 살게된 피노키오는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무덤을 지나갑니다. 이 때 '이 꼭두각시도 언젠가 죽는다'는 내용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는데요. 겉모습은 여전히 나무 인형이지만, 피노키오는 마침내 남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으로 거듭났음을 명확히 알리는 대목이지요.
우리가 인공지능 소재 영화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영화들도 죽음으로 로봇에게 인간성을 부여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피노키오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 'A.I.'를 만든 것으로 유명합니다. 영화 속의 11살 짜리 소년 로봇 '데이빗'은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인간은 이해하지 못할 기행을 저질러 버림받습니다. 데이빗은 자신이 인간 소년이 되면 엄마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놀이 동산의 파란 요정 동상 앞에서 자신의 기능이 정지될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2000년 뒤, 인류가 멸종한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들은 데이빗이 가진 인류 연구 사료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이들은 로봇 소년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푸른 요정을 만들고, 하루밖에 살 수 없는 엄마를 선물합니다. 데이빗은 소원대로 엄마를 다시 만나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함께 잠이 들지만,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의 앤드류 마틴도 인간 여자와의 결혼과 자신의 인간됨을 증명하려 법원에 출석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습니다. 아무리 인간처럼 사유하고 사랑한들, 로봇은 유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개조 끝에 아내와 함께 늙은 앤드류는, 결국 자신을 최고령 인간으로 인정하는 법원의 선고 직전 세상을 떠납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그의 작동이 멈춘 걸 보고서, 자신의 생명 유지 장치도 종료합니다.
피노키오가 크라트 호텔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청각의 세계가 우리의 실존을 더 심층적으로 자극한다고 봤다. 피노키오는 악기를 연주하며 청중과 자신의 실존을 자극한다. (사진=네오위즈)
'음악'으로 인간의 잠재력 키우는 인형, P
게임 P의 거짓에선 피노키오를 인간으로 완성하는 장치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음악입니다. P의 거짓 속 피노키오는 선의의 거짓말로 LP 음반을 얻습니다. 극 중 화석병 격리구역 창가의 '우는 여인'은 자신의 눈이 비늘에 완전히 덮이기 전에, 가문에 빼앗긴 아기를 크라트 시청에서 데려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요청을 승낙하고 시청에 가면 낡은 아기 인형을 주워 우는 여인에게 갖다줄 수 있습니다. 시력을 잃어가는 이 여인은 아기 인형을 안고 "어떤가요, 친절한 분. 아기가 정말 귀엽지 않나요?"라고 묻습니다. 이때 피노키오는 "귀여운 아기다" 또는 "그건 아기 인형이다" 중 하나로 답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선의의 거짓말인 "귀여운 아기다"를 선택하면 'Feel'이라는 노래가 담긴 LP 음반을 받게 되는데, 이걸 크라트 호텔에 있는 축음기에 넣어 들을 수 있습니다. 노래를 끝까지 틀면 피노키오 몸 속의 태엽이 반응합니다. 이후 전개 과정에선 피노키오가 인간성을 얻을 때마다 태엽이 반응하는 대신 '에르고'가 속삭입니다. 심지어 피노키오는 호텔에 있는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는 능력도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작품 곳곳에는 그림도 많이 걸려있습니다. 그럼에도 피노키오가 그림에 앞서 음악으로 인간의 실존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시간의 르네 데카르트와 블레즈 파스칼에 이어 또 한 명의 프랑스 철학자를 불러와야겠습니다. 바로 질 들뢰즈입니다. 그는 청각의 세계가 우리의 실존을 더 심층적으로 자극한다고 봤습니다. 이 게임을 만든, 네오위즈 산하 라운드8 스튜디오는 프랑스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을 배경으로 택했는데, 작품에 대한 해석 역시 같은 나라 철학자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어떤 현실적인 대상이라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주어진 모습인 '현실성' 외에, 앞으로 다르게 생성될 수 있는 잠재적인 성격인 '잠재성'도 갖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모습으로 생성되려면 잠재성의 층위로 운동해야겠지요.
현실적으로 주어진 모습인 현실성을 떠나, 새로운 모습으로 생성되기 위해 잠재성의 층위로 복귀하는 운동을 그는 '탈영토화'라고 불렀습니다. 탈영토화는 고정된 지역을 벗어난다는 의미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려 기존의 가치와 의미를 떠나는 운동을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과 듣는 것의 차이, 음악의 중요성이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가령 캔버스를 떠난 물감과 악보를 떠난 음, 둘 중에 어떤 것이 우리에게 정서적 감응을 주는 잠재성을 가진 것이라 볼 수 있을까요. 단연 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음은 우리 내면으로 침투하고, 우리들을 몰아내고, 질질 끌고가고 가로지른다"고 주장했지요. 들뢰즈를 빌리자면, P의 거짓 속 피노키오의 음악 감상은 곧 자신의 변화를 위한 잠재성을 자극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P의 거짓을 플레이하는 게이머는 이처럼 변화의 잠재성을 가진 피노키오를 인간이 되게 하는 선택을 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선택들을 하게 될 텐데요. 게임 속 P의 분별력 있는 행동은 온전히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게이머들이 동화에서 파란 머리 요정이 피노키오의 꿈에 나타나 입맞춤 하고 하는 당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동화에서 파란 머리 요정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부모님을 정성스레 돌보는 아이들은 항상 커다란 칭찬과 사랑을 마땅히 받아야 한단다…계속해서 분별력 있게 행동하렴. 그러면 행복해질거야".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