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변소인 기자]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환경부 정책에 애먼 중소기업만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일순간 발주 취소와 반품이 이어지면서 피해가 막대한데요. 수조원을 들여 마련한 장비도 애물단지로 전락했습니다. 더 나아가 친환경 사업에 대한 분위기가 얼어붙고 관련 연구에도 제동이 걸리는 모습입니다.
앞서 환경부는 지난 7일 일회용품 관리정책을 '과태료 부과'에서 '자발적 참여'로 전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일회용품 사용 규제 계도 기한 종료를 약 2주 앞둔 시점에서 나온 발표였습니다. 가장 논란이 많았던 커피전문점의 플라스틱 빨대 사용 금지 계도기간을 연장하고, 대체품 시장의 성장을 유도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일회용품 사용제한 대상 품목에서 종이컵을 제외하기로 했습니다. 사실상 관련 규제를 철회한 셈입니다.
그동안 해당 정책 시행이 늦어지면서 논란이 많았습니다.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행하는 것은 소상공인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부는 친환경 정책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을 강조하면서 계도기간을 길게 가져왔습니다. 이에 따라 친환경 사업에 관심 있는 이들은 그간 일회용품 사용 규제 시행일에 맞춰 관련 준비를 해왔습니다. 코로나19 유행기간 동안 시행이 미뤄졌기에 이달 24일에는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 열린 '서울카페쇼'에서 동일프라텍이 제조한 생분해 빨대가 전시돼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급작스런 정책 후퇴로 친환경 제품을 제조하는 중소기업들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반복되는 계도기간 연장에 두 달 전에도 환경부에 시행 확인을 했다는 박정철 아가페코코리아 대표는 언질 없는 정책 변경에 기가 막히다는 반응입니다. 쌀 빨대를 제조하고 최근 생분해 봉투까지 개발을 마친 박 대표는 "쌀 빨대의 제조 단가를 낮추기 위해 대량 생산을 하려고 1년치 원자재를 매입했는데 이제는 공장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쌀가루는 식품이기 때문에 다른 용도로 활용할 곳도 없고 유통기한이 있어서 폐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박 대표는 재배 계약을 했기 때문에 쌀 원자재로만 4억~5억원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규제 시행을 앞두고 장비도 늘려 해당 사업에만 누적 약 40억원 정도의 투자비용이 들어갔습니다. 해외에서도 아가페코코리아 제품에 대한 문의가 있었지만 국내 사업 반응을 보고 계약을 결정하겠다고 한 상황이라 결국 수출도 물거품이 됐습니다. 박 대표는 정부에서 언질이라도 줬다면 대량 계약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환경부의 규제 철회 선언 다음날인 지난 8일부터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는 '서울카페쇼'가 열렸습니다. 적게는 500만원부터 많게는 3000만원의 참가비용을 내고 부스를 꾸린 친환경 중소기업들은 카페쇼에서 파리만 쫓는 신세가 됐습니다. 고심 끝에 개발한 친환경 제품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관람객들은 "이제 이거 없어도 된대"라는 말과 함께 부스를 그냥 지나치고만 있습니다.
10일 서울카페쇼에서 만난 한 친환경 제품 제조업체 대표는 친환경 빨대 제품이 담긴 상자들을 흰 천으로 덮어뒀습니다. 걱정에 입술이 부르텄다는 이 대표는 "당장의 주문 취소 물량이 400만개인데, 앞으로 납품할 물량이 모두 사라진 셈이니까 피해를 정확하게 가늠하기도 힘들다"며 "재고가 1500만개, 2억원 규모 정도다. 설비에도 수억원이 들어갔고 원금 만기가 도래하는데 당장 방법이 없다. 정부에서 대책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지난 2018년 청년창업으로 사업을 시작한 이 대표는 감당하기 힘든 위기에 길을 잃은 표정이었습니다.
생분해 빨대를 제조하고 있는 김지현 동일프라텍 대표는 이곳에서 스마트폰으로 발주 취소 기업들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친환경 제품 브랜드 디앙을 홍보하러 나온 김 대표는 '일회용품 규제 11월24일부터 바뀌는 점'이라는 홍보물도 마련했지만 다 소용이 없게 됐습니다. 김 대표는 "현재 들으면 알만한 커피 가맹점 등 14군데가 취소를 했다. 발표를 하려면 카페쇼 끝나고나 하든지"라며 "현재 생분해 빨대를 50% 할인해 판매하고 있는데 어제 쇼핑몰에서 10개 팔았다"고 전했습니다.
사실 동일프라텍은 플라스틱 빨대도 제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생분해 빨대로 사업을 전환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기존 플라스틱 빨대 설비는 4개에서 2개로 줄이고 생분해 라인을 늘리고 있었다. 플라스틱 원료도 준비를 해놓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날이 급여일이라는 김 대표는 벌써부터 다음 달 급여 지급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친환경 정책 철회로 인한 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김 대표는 정부 과제로 해양 생분해 관련 연구도 진행하고 있었다는데요. 환경부 발표 후 다급하게 연구를 보류시켰습니다. 당장 생계에 빨간불이 켜진 중소기업들은 친환경 연구까지 챙길 여력이 없습니다.친환경 제품 유통사나 해외 진출 기업, 친환경 제품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대기업과의 B2B(기업 간 거래)를 하고 있는 기업들의 사정은 이들에 비하면 그나마 상대적으로 나은 편입니다.
자영업자들도 마냥 환영하는 분위기만은 아닙니다. 고장수 전국카페사장협동조합 이사장은 "자영업자들 입장에서 일단 추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은 환영할 만한 일이긴 한데 제도 시행을 위해 준비를 해왔던 자영업자들은 바보가 됐다"며 "정부가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바보로 만들고 안 지키는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게 만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제도 시행에 대비해 2~3달 분량, 200만~300만원어치의 친환경 빨대를 미리 준비했던 고 이사장 역시 허탈하다는 반응입니다.
친환경 빨대 제조업체들은 오는 13일 환경부 북문 건너편 체육관 앞 인도에서 집회를 열 예정입니다. 트럭에 빨대를 싣고 가 심각한 재고량을 몸소 보여주겠다는 계획입니다.
한편, 논란이 거세지자 환경부는 10일 중소벤처기업부와 함께 피해 업체들에 대한 지원책을 실무단에서 유선상으로 논의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이 오가지는 않았으나 조만간 대책을 마련한다는 방침입니다.
변소인 기자 bylin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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