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연석·윤민영·김수민 기자] 올해 법원은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역할에 충실하려 했던 해로 평가받을 만한 유의미한 판결을 내놓았습니다.
특히 ‘동성 커플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첫 인정’ 등 소수자 인권 보호에 의미 있는 첫 걸음 내딛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베트남 전쟁 민간인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등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법원의 노동 감수성은 아쉽습니다. 산업안전법 전면 개정과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계기를 이끌어낸 고 김용균씨 사망사건과 관련해 원청 대표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려 유족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습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의의 여신상. (사진=뉴시스)
①동성커플 건보 피부양자 자격 인정
가장 먼저, 주목할 만한 판결은 동성 커플의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겁니다. 현행법상 동성 커플이 법적 부부로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 동성 커플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동성 배우자의 법적 지위를 인정한 판결은 아니었지만 재판부는 동성이더라도 ‘실질적 사실혼 관계’에 있다면 국민건강보험법상 피부양자가 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서울고법 행정1-3부(이승한·심준보·김종호 부장판사)는 지난 2월21일 소성욱씨가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잃어 보험료가 부과된 데 불복해 제기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성적 지향을 이유로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평등의 원칙을 위배하는 차별대우라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동성간의 사실혼을 인정한 건 아니지만 이번 판결로 동성 부부의 법적 지위 인정을 앞당길 수 있는 그 시작점이 될 거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결혼 5년차 동성부부 소성욱씨와 김용민씨가 22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민건강보험공단 상대 보험료 부과 취소 처분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승소 후 입장을 말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은 소성욱 씨가 건보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1심을 뒤집고 동성부부의 건보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며 원고 승소를 판결했다. (사진=뉴시스)
②베트남전 학살 한국정부 배상책임 첫 인정
법원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를 주장한 피해자가 우리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자 측의 손을 들어준 판결이 갖는 의미도 큽니다.
베트남전쟁 학살 사건과 관련해 우리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올해 2월7일 베트남인 응우옌 티탄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습니다.
사건의 쟁점은 한국군이 학살의 가해자가 맞는지에 대한 사실 판단이었는데, 재판부는 여러 증언과 증거를 바탕으로 당시 군인들이 응우옌씨 집에 가 총으로 위협하고 밖으로 나오게 한 뒤 총격을 가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간 정부는 우리 군이 가해자임을 증명할 수 없고, 게릴라전으로 전개된 베트남전 특성상 정당행위였다고 주장했지만 이 점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소멸시효 만료 여부도 또 다른 쟁점이었는데 재판부는 응우옌씨가 국교 단절 등 그간 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던 사유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정부 측의 소멸시효 만료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응우옌 티탄씨가 2월7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관련 대한민국 상대 소송' 1심 선고기일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뒤 화상 연결을 통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뉴시스)
③위안부 피해자 일본정부 배상책임 인정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본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도 주목해야 합니다.
주권국가인 일본에 대해 한국 법원의 재판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국가 면제’를 이유로 각하 판단한 1심을 뒤집었습니다. 한국 법원의 일본에 대한 재판권을 인정한 겁니다.
서울고법 민사33부(구회근·황성미·허익수 부장판사)는 11월23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일부 지연손해금을 제외한 원고의 청구 금액을 대부분 인정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국제 관습법에 관한 국가 실행과 법적 확신을 탐구하려면 국제 관습법의 변화 방향과 흐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며 “법정지국 영토 내에서 그 법정지국 국민에게 발생한 불법행위에서는 주권적 행위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국제 관습법이 존재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습니다.
불법행위엔 국가면제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하면서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점에서 판결이 갖는 의미가 크지만 아직까지 피해자들이 피해 보상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일본 측은 국가면제에 따라 한국 법정에서 재판 받을 수 없다며 1심부터 2심에 이르기까지 줄곧 무대응으로 일관해왔습니다. 일본 측은 이번 판결에도 상고를 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도 2021년 1월 승소가 확정됐지만 여전히 배상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11월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 선고기일에서 1심 패소 취소 판결 뒤 법원을 나서며 기뻐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④ 아쉬운 판결…김용균 사건 원청 대표 무죄 확정
산업안전법 전면 개정과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계기를 이끌어낸 고 김용균씨 사망사건과 관련해 사망사고의 책임을 원청기업 대표에게 물을 수 없다는 판결도 있었습니다.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지난 7일 업무상 과실치사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한국서부발전 김병숙 전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하청업체인 백남호 전 한국발전기술 대표는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받았습니다.
김씨의 죽음은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고 기업 대표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의 시작점이었지만 소급 적용되지 않는 탓에 김씨 사건에는 옛 산업안전보건법과 업무상과실치사죄가 적용됐습니다.
유족과 노동계는 선고 이후 “중대재해처벌법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 판결”이라고 반발했습니다.
특히 김씨의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기업이 만든 죽음을 법원이 용인했다”며 “김 전 대표가 무죄라면 앞으로 다른 기업주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여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12월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고 김용균 노동자 사망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뉴시스)
유연석·윤민영·김수민 기자 ccbb@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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