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미스터리)②'최대 10만명' 사유재산 강탈…'대일청구권·SOFA' 합작품
미군정 강제 예입, 한국 책임으로 떠넘겨…난데없는 대일청구권 보상
2024-10-03 06:00:00 2024-10-03 06:00:00
[뉴스토마토 한동인 기자] 미군정 57호에 따른 우리 국민의 사유재산 피해가 명확했음에도 추후 제대로 된 배상이 이뤄지지 못한 건 'SOFA(한·미 행정협정)'와 '대일청구권' 영향으로 분석됩니다. 미군정이 일본 은행권의 예입을 강제했지만 SOFA를 통해 추후 청구가 불가능하도록 했고, 한·일 협정에 따른 대일청구권으로 일본의 개인 배상을 막고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배상했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미군정 57호에 의한 피해자는 최대 1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보입니다.
 
대일청구권자금피해자환수위원회 피해자 후손들이 지난 2019년 7월 23일 청와대 사랑채 인근 도로에서 대일청구권 자금 환수 촉구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국 정부가 직접 막은 '배상의 길'
 
지난 1997년 9월 2일 미국 육군성 주한미군배상사무소는 미군정 57호 피해자협회 회장인 임춘남씨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에 대한 답을 내놨습니다. 임씨는 같은 해 3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미군정 57호 피해 금액의 배상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진정서를 보낸 바 있습니다. 
 
주한미군배상사무소는 임씨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귀하(임씨)께서 주장하는 점에 대해 법률적 탐구 및 조사를 했지만, 법적 근거가 전혀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이 배상의 사유가 없다고 밝힌 두 가지 근거는 SOFA와 대일청구권입니다.
 
1967년 2월 9일 한·미 행정협정인 SOFA가 발효됐습니다. 그런데 SOFA 제23조 13항에는 '본조의 규정은 본 협정의 효력발생전에 발생한 청구권에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청구권은 합중국 당국이 이를 처리하고 해결한다'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이에 미국 측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에서의 모든 업무가 미군정장관의 손에서 대한민국 정부 당국자의 손으로 이관됐다고 주장합니다. 미군정 57호 피해를 한국 정부에 요구하라는 겁니다. 
 
두 번째 근거는 박정희정부의 대일청구권 보상입니다.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이 이미 대일청구권을 통해 보상을 받았다는 건데요. 
 
박정희정부는 1971년 1월 19일 대일민간청구권신고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습니다. 해당 법률안 2조 1항에는 '일본은행권·대만은행권 예입'이라는 미군정 57호 규정에 따라 지정된 금융기관에 예입한 예입금 등에 대한 보상을 명시합니다.
 
대일청구권은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들이 겪은 억압과 착취에 대해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상의 청구권인데요. 박정희정부에서는 일본이 아닌 미군정에 따른 사유재산 강탈을 대일청구권으로 배상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런데 1965년 한·일 회담 당시 기록을 보면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에 대한 개별 배상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 차원에서 일괄 배상으로 대신하겠다며 '정치적 타결'로 협상을 마무리 짓습니다. 
 
심지어는 정부가 일제강점기가 피해자 103만 2684명에 대해 총 3억6400만달러 배상을 일본 측에 요구했는데, 피해자들에게 돌아간 배상 금액은 다릅니다. 우리 정부는 일제강점기 사망자에 대해 일본 측에 1650달러를 요구했는데, 실제 유가족들이 받은 금액은 당시 환율로 622달러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미군정 57호에 따른 피해자들도 제대로 된 배상을 받지 못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박정희정부는 일본 측으로부터 받은 3억달러 중 95%를 경제개발 비용으로 사용하며,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재무부 재무정책국 자금시장과가 남긴 대일청구권 관련 자료에는 '대일민간청구권자금은 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공장건설, 소양강댐건설 등 국책사업에 사용됐다'고 적혀있습니다.
 
1967년 1월 7일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미군정 57호 피해자가 약 10만명에 육박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사진=부산일보)
 
피해규모도 금액도 '미궁'
 
미군정 57호의 피해자 규모와 그 금액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몇 가지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보도 내용을 종합하면 박정희정부는 1971년 5월 21일부터 1972년 3월 20일까지 10개월 동안 대일청구권 관련 신고를 받았는데, 총 14만 1803건이 접수됐습니다. 
 
다음날인 3월 21일 <동아일보>는 마감 당일 비교적 한산하던 신고 사무소에 인파가 밀려 창구가 붐볐고, 대일청구권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신고법의 인색한 규정으로 인해 누락된 사레가 많다고 보도했습니다. 특히 미군정 57회 피해자들 중 증빙서류 문제로 신고를 하지 못한 사람이 뜻밖에 많았고, 부산에서는 예치자투쟁위원회까지 결성되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대일청구권 관련 접수 총 14만 1803건 중 미군정 57호 피해자 규모를 특정할 수 없지만 또 다른 기록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1967년 1월 7일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부산 민락동에 사는 이제춘씨는 대일청구권을 근거로 정부에 미군정 57호 피해보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씨는 미군정 57호에 따른 피해자가 10만명이나 된다면서 이들이 민간청구권협의회를 조직하고 변호사를 고문으로 모셔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미군정 57호에 의한 피해자는 10만명에 육박합니다.
 
문제는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이 대일청구권을 통해 보상을 받긴 했지만, 30년이 지나서야 받은 금액이 터무니없었습니다.
 
미군정 57호 피해자모임 회장인 임씨는 대일청구권을 통해 195만 6000원을 보상받았습니다. 하지만 1946년 미군정 57호에 따라 모친이 예입한 금액은 6만 5200엔이었습니다. 당시의 명확한 환율은 기록에 없지만 임씨는 1945년경 일본 동경 근교의 땅값이 1평당 1엔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거액의 사유재산을 강제로 예입하고 찾지 못한 것은 물론, 미군정 57호와 관계도 없는 대일청구권으로 소액의 보상만 받은 셈입니다.
 
한동인 기자 bbh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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