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업무를 위해 나선 골목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을 마주한다. 새벽까지 영업장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휘황찬란했던 조명을 끄는 순간이 그 불빛 아래에서 소모되었던 자본의 배설물이나마 가장 먼저 수거할 수 있는 기회라 이토록 서둘러 거리로 나설수밖에 없었으리라. 식사는 하셨는지, 춥지는 않으신지 차마 물어볼 틈도 없이 노인의 뒷모습이 바쁘다. 아니 일이 바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일부로 등을 돌려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따위 눈빛으로 동정하지 말라’고 무언의 벽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삶의 수레바퀴 속 수많은 약자들의 삶이 있고, 여러 위기가 층층이 공동체 안에 있다. 살갗을 후비어파는 한 겨울 차디찬 공기마냥 처절한 현실이 있는 것이다.
무릇 그렇기에 공동체안의 질서와 공동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제도와 구조를 만들고 정비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고 이 절대 절명의 임무를 잘 수행해 달라고 주어진 것이 권력이다. 그러나, 이 12월 겨울 한파 속 대한민국은 관측조차도 힘든 까만 우주 속 블랙홀에 빨려들어 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만큼 불안한 현재와 전혀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혼재한 혼돈의 시절이 있었던가. 절망과 멸망의 망령이 동시에 우리 공동체 전체를 덮치고 있다. 무력을 통한 권력 독점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윤석열이 일으킨 내란 범죄가 그 원인이다. 자신과 주변 가족 그리고 추앙세력만을 위한 대통령이 되기로 결심한 윤석열이 벌인 범죄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가 가득한 도로 위를 내달리는 자동차가 되었다. 어디서 불쑥 그 어떤 위해한 존재가 나타나 치고 들어올지 모를 일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로 발현한 위험이 경제, 외교, 안보 등 국가 활동 전반에 경고음을 울리고 있고, 당장의 위기를 넘어서더라도 한동안 그 여진은 우리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이 극도의 위기의 순간 희망은 수 많은 깨어있는 시민들에 의해 피어났다. 계엄이 선포된 그날 밤 나도 집에서 계엄령 선포 방송을 보고 바로 국회로 달려왔었다. 그 일단의 시민 의혈단 속에서 14세의 중1학생도 만났고, 저 멀리 속초에서 차를 몰고 국회 앞으로 온 젊은 연인도, 초등학생 자녀의 손을 잡고 함께 나온 가족도 만났다. 그랬다. 공동체의 위기를 수수방관이 아닌 적극적 참여로 참된 대한민국의 주인으로서의 태도로 막아선 이들은 권력 한줌 없는 보통의 시민들이었다.
계엄이 국회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되고 무효화된 후에도 ‘대한민국’호는 여전히 암흑 속에 내몰려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희망마저 없다고 취급되던 그 순간 작은 불씨가 광장에서부터 타올랐다. 광장을 메운 각양각색의 응원봉의 불빛이 그것이었다. 내 최애를 위해 간직해 온 응원봉을 기꺼이 꺼내들고, 이 국가적 위기에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장으로 나온 수 많은 시민들이 밝힌 새로운 희망의 빛줄기였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권력을 소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만 이용하고자 무모한 획책을 한 파렴치범들이 차마 예상하지 못한 선한 힘의 작동이었다.
여전히 위태하나 그나마 우리가 새로운 다음 장을 열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공동체의 운명을 멸망 앞에서 현명한 시민들이 만들어낸 은하수 불빛 보다 찬란한 저항의 물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의 민중가요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지던 순간, 일제히 함께 불을 밝혔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그나마 서둘러 이 파멸의 길에서 멈추어 설수 있었다.
광장에 나온 수많은 청년들은 말했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유령이라 생각한 계엄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광장으로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계엄은 현재의 위기이자 미래의 위기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일제강점과 군사 독재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폭력적 민주주의 파괴는 분명 가장 약한 고리에 있는 수 많은 약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제일 먼저 작동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이번에는 분명한 단죄와 확실한 매듭 지음이 있어야 하리라. 그리고 이 위기가 사라진 후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해 더 폭넓은 고찰을 해야 하리라. 같은 위기가 반복되지 않도록 더 촘촘하고 더 두터운 좋은 민주주의 둑을 만들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더 진보한 사회 구조도 구축해야 하리라. 약자의 삶이 기본으로 보장되는 사회가 되기도 꿈꾸어 본다.
무엇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순간 위기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광장으로 나섰던 사랑하는 나의 동료 시민들에게 그 무엇보다 깊고 높은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박창진 시민단체 을들의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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