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시인 T.S. 엘리엇의 작품 <황무지>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경찰의 총격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1960년의 4·19 학생혁명 이후 친숙해진 시구이다. 올해로 66주년을 맞는 4·19를 어렴풋이 기억하는 세대는 70대 이상의 고령층이다. 젊음과 정의감을 상징하던 4·19 세대도 오래 전에 현직에서 물러났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날이 오면 서울 수유동의 국립4·19민주묘지에는 정관계 인사들이 몰려와 증명사진을 찍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대학, 중고교에서 기념식을 엄숙하게 거행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이 무렵이 되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군사정권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4·19 당시의 핵심 쟁점은 부정선거였다.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급서로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했다. 그러나 고령의 이승만이 임기 중에 죽으면 부통령이 승계할 것이므로 자유당은 반드시 부통령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병약한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려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서는 공개투표, 대리투표, 개표 결과 조작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당시 부정선거에 항의할 수 있는 조직화된 사회 세력은 해방 이후 교과서를 통해 민주주의 원리를 배운 학생 집단밖에 없었다. 고교생이 방학 때 문맹퇴치 사업에 참여해야 할 정도로 아직 문자 해독률이 낮은 사회였다. 마산의 김주열 열사는 중학생이었고, 지방에서는 4·19 이전에도 고교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나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세대의 민주적 정치의식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유당 정권은 “총은 쏘라고 준 것이다”라며 무력 진압을 시도하다 자멸했다. 이승만은 망명하고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관 주도 부정선거 의혹은 그치지 않았다. 자유당 정권의 최고위 간부들을 처형한 박정희정권도 1967년의 6·8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대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박정희가 대통령을 세 번 할 수 있도록 개헌하는 데 필요한 의석 확보가 목적이었다. 헌법 질서가 파괴된 1972년의 10월 유신 이후의 선거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절차적 민주화가 제대로 진행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부정선거는 사라졌다.
지금 한국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2024년 총선, 2025년 대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정작 조직적 부정선거로 헌정 질서를 교란해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만든 이승만, 박정희를 찬양하고 있다. 전 대통령 윤석열도 내란을 시도하며 부정선거의 증거를 찾겠다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군을 보냈다. 심지어 일부는 미국까지 날아가 한국의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4·19 희생자들을 애도했다거나 4·19 정신의 계승을 다짐했다는 소식은 없다. 행동하는 보수파의 주류는 가진 것이 많은 기득권층이 아니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빈곤층도 아니다. 군사정권 시절에 주입된 맹목적 반공 의식이 남아 있는 외로운 고령자 집단이나 제대로 된 직장을 찾지 못해 울분에 쌓인 청년층이 유튜브의 선동으로 동원된 것이다.
서울 강북구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유족이 참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각종 여론조사에서 20대, 30대가 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이라는 결과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계승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밤 10시가 넘어야 간신히 학원에서 풀려나는 입시 전쟁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젊은 세대는 민주적 가치를 배울 기회 자체가 없었다. 무한경쟁 속에서 각자도생하라는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세대는 공익, 연대,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민주사회의 가치관이 낯설다.
1960년에 4·19 세대가 지향했던 절차적 민주주의는 일단 달성되었다. 그러나 4·19 정신의 재해석은 필요하다. 현재는 생활세계의 진정한 민주화를 달성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때다.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각종 차별이나 부조리를 없애고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소외된 집단이 원천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게 만드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물론 4·19 직후에 분출했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되살려야 한다.
이종구 성공회대 사회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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