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1. 324조7612억원. 삼성그룹의 시가총액 규모다.(4월30일 기준) 삼성을 더한 국내 10대 그룹의 전체 시가총액이 737조1770억원임을 감안하면 삼성이 국내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특히 삼성전자 혼자서만 같은 기간 204조원의 시총을 기록해 재계 2위인 현대차그룹(160조7113억원)을 손쉽게 따돌렸다. 이는 전체 시장의 19%에 달한다.
삼성전자는 이미 지난해 말 전세계 IT기업 가운데 시총 규모로 탑5에 들었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IBM, 구글 등 내로라하는 IT 대표선수들만이 삼성전자 앞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올 들어 스마트폰 시장에서 절대강자 애플을 제치고 판매율 1위로 올라서는 등 삼성전자의 고공행진은 보는 이를 아찔하게 할 정도다.
그런데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만족도는 삼성에 대한 자부심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2. 삼성은 해마다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정작 삼성맨으로서 사회로 들어서면 여론의 혹독한 지적 앞에 이내 혼란을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가경제에 대한 기여는 쳐다보지 않고 ‘삼성공화국’이란 비판만을 늘어놓는다. 기업의 사회적 의무를 저버린 채 오로지 이익에만 매달린다는 게 지적의 공통된 요지다.
이 같은 사회적 괴리는 삼성에 대한 이중적 시각을 고착화시켰다. 오너가 경영에 복귀하면서 주춤하던 삼성의 성장세가 다시 본궤도에 올랐지만, 이런 성과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고, 그의 말실수만 반복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질책과 독려, 대안 없는 맹목적 비판은 삼성을 떠나 한국사회 전체로도 큰 손해라는 지적도 있다. '삼성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전제되지 않는 한 원인과 현상, 그리고 앞날에 대한 분석은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삼성으로서도 이미 고질화된 사회적 편견과 불신을 탈피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에 맞닥뜨렸다.
◇성찰과 자성..“잘못됐다” 넘어 “잘못했다”
“경쟁력은 안에서는 사람과 기술, 밖에서는 사회의 믿음과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삼성은 국민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투자와 고용을 확대하고, 수출에 전력을 다하며, 협력사가 세계 일류의 경쟁력을 갖추도록 정성을 쏟아야 한다. 또한 어려운 이웃,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려 우리사회의 발전에 동참해야 한다.”
이건희
삼성전자(005930) 회장의 올해 신년사다. 시대 요구를 관통하는 이 회장의 발언을 계기로 삼성은 사회와 함께 호흡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먼저 자기성찰이 전제됐다. 기존의 “잘못됐다”에서 벗어나 “잘못했다”로 선회했다. 이전 삼성 모습에 비하면 적잖은 변화다.
대표적 사례가 공정위 조사방해 파동과 이에 대한 삼성의 대처였다.
삼성의 대응에 여론이 집중된 순간, 삼성은 즉각 머리를 숙였다. 김순택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명백한 잘못이다”며 “철저한 자기반성과 확고한 재발방지, 준법경영”을 약속했다.
배경에는 이 회장의 진노가 있었다. “삼성이 왜 이 같은 짓을 하느냐”는 질타가 삼성에 울려 퍼졌다. 삼성 고위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격노가 대단했다”고 전했다.
오랫동안 삼성과 관계를 맺어온 재계 관계자는 “사안이 크긴 했다”면서도 “자존심만을 중시했던 예전 삼성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연출됐다”고 말했다. 여론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진정세로 접어들었다. 여진은 삼성에 대한 무언의 압박으로 자리했다.
◇여성 채용 비율 30% “만족 못한다”
이 회장이 강조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본격화됐다.
먼저 여성 인력에 대한 중요성이 사내 문화로 정착됐다. 이 회장은 지난달 여성 승진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여성에게는 남자가 갖지 못하는 숨겨진 힘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떻게 회사일과 가사를 다 하느냐”며 “남자들한테 시켜보면 다 못한다. 나부터 도망간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삼성은 여성의 덕을 보고 있다”며 “지금 여성 채용 비율이 30% 정도인데, 앞으로 비율을 더 높여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 회장은 보육시설 등을 꼼꼼히 되짚으며 개선점이 없는지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관련 책임자들에겐 제기된 문제점에 소홀함 없이 대처해 여성이 편안하게 일할 수 있는 사내 복지를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그룹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회장은 유독 여성 인력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해왔다. 1992년 여성 공채를 처음으로 실시한 데 이어 1993년·1994년에는 일반 공채와 함께 여성 전문직 공채를 별도로 실시해 진입의 문턱을 낮췄다. 대졸 신입사원 중 여성 비중을 보면 2009년 21%에서 2010년 26%, 2011년 30%로 해마다 급격히 늘었다.
이 회장의 여성 인력에 대한 지론은 그의 저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1997년 펴낸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채용이나 승진에서 불이익을 준다면 당사자가 겪게 될 좌절감은 차치하고라도 기업의 기회 손실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이냐”며 한 발짝 앞선 생각을 펼쳐보였다.
이 회장이 지난해 4월 출근을 재개하면서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내 보육시설인 어린이집이란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한 직원이 “만족도가 높아 대기 순번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고 고충을 토로하자 이 회장은 현장에서 어린이집 확충을 지시하기도 했다.
◇고졸인력 대대적 확충..“학력보다 사람”
삼성은 9일 올해 처음으로 실시한 고졸 공채에서 당초 계획보다 100명 많은 700명을 선발했다. “사회적 양극화 해소를 위한 기회 균등 실현 차원”이라고 삼성은 설명했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삼성의 인재관이 잘 묻어나 있다. 원기찬 삼성 인사팀장(부사장)은 “감동적이고 올곧은 사연을 갖고 있고, 가치관이 뚜렷한 인재들을 어떻게 안 뽑을 수가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특히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이들에게 삼성이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결코 학력으로 사람을 재단해선 안 된다’는 이 회장의 철학이 현장에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삼성은 학력 위주의 사회 분위기 개선을 위해 그룹 차원에서 고졸 공채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삼성은 이미 고졸 전체 채용 인원을 2010년 7300명에서 2011년 8000명, 2012년 9100명으로 늘렸다. 과거 생산직에 머물던 고졸 인력을 역량에 맞게 전문 분야로 이동시켜 학력에 따른 기회 박탈은 철저히 배제한다는 복안이다.
삼성은 고졸 채용에서 한발 더 나아가 다양한 사내 양성제도를 통해 이들의 역량을 극대화시켜 나갈 계획이다. 채용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질적 인재 육성을 위해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나가겠다는 얘기다. 물론 승진 등에 있어서도 차별받지 않도록 사내 평가제도를 철저히 운용해 나가기로 했다.
◇장애인에게도 열린 공간..“기대에는 못 미쳐”
장애인에 대한 삼성의 접근 또한 다른 대기업보다 진일보해 있다.
이 회장의 출근경영 이후 삼성은 지난해 처음으로 장애인에 대한 공채를 실시했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를 비롯해
삼성전기(009150), 삼성SMD 등이 장애인 공채에 나섰으며 타 계열사들도 조만간 동참할 예정이다. 올해는 600명을 추가로 채용한다는 방침이다.
물론 전체 대비 장애인 고용 비율은 여전히 낮은 단계다. 2005년 0.4%(600명)였던 장애인 비율은 2007년 0.86%(1500명), 2010년 1.35%(2600명), 2012년 3월말 기준으로 1.6%(3300명)로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지만, 여전히 정부가 제시한 장애인 의무고용비율 2.5%와는 거리가 있다.
삼성은 의무고용비율을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달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동시에 장애인 근무여건 등 질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장애인 고용전문가를 영입해 이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한편 편의시설 확충, 함께 어울리는 조직문화 가꾸기에 주력하고 있다.
또 삼성SDS와
에스원(012750)은 장애인표준사업장으로 운영되는 별도법인 ‘오픈핸즈’와 ‘에스원CRM’을 설립했다. 현재 오픈핸즈에는 99명, 에스원CRM에는 45명의 장애인이 일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앞서 지난 2006년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의 직무교육을 수료한 장애인 전원을 고용하는 맞춤형 훈련과정을 도입했다.
장애인 관련 단체에서는 “삼성의 노력에 고무된다”면서도 “아직 아쉬운 점도 많다”고 말했다. 특히 배려 차원의 접근보다는 편견을 버리고 차별 없이 다가서 줄 것을 수차례 강조했다. 삼성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따뜻한 손길’ 드림클래스와 사회적 기업
여성·고졸·장애인 등 이른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삼성의 제도적 뒷받침은 본궤도에 올라섰다는 평가다. 삼성은 이와는 별도로 드림클래스 사업과 사회적 기업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드림클래스는 올 3월부터 실시된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사회공헌사업이다. 학습 의지는 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충분한 교육 기회를 갖지 못하는 저소득층 중학생 15000명을 대상으로 실질적인 학습 능력을 높일 수 있도록 방과 후 학습을 책임진다는 게 사업의 취지다.
이를 위해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등 경제력이 취약한 빈곤층의 자녀 7200명을 선발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21개 주요도시에서 영어·수학 등 핵심 과목의 주중 방과 후 수업을 본격 시행했다. 각 해당 중학교에서 선발되는 학생들은 학년별 20명씩이며, 2개 반으로 나눠 주 4회, 8시간의 수업을 받게 된다.
또 강사 확보가 어렵고 학생들이 산재해 있는 중소도시와 도서지역 중학생 7800명을 대상으로 올해 시범적으로 주말 수업과 방학 캠프를 실시한 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인근 대학교에서 학업성적과 봉사정신, 리더십 등이 뛰어난 대학생들을 강사로 선발해 활용하고, 이들에 대한 장학금 등의 명목으로 연간 300억원의 재정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삼성은 사회적 기업 확산에도 전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목적은 취약 계층의 자립에 있다. 향후 3년간 7개의 사회적 기업을 설립, 지원키로 했다.
계획에 따라 지난해 2월 서울·경기지역에 있는 30개 지역아동센터(공부방)의 초등학생들을 지원하는 ‘희망네트워크’를 설립했다. 3월에는 충북 음성의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글로벌투게더 음성’을 설립하고 운영 중에 있다.
삼성은 그간의 경험을 살려 올해 안으로 글로벌투게더 2개사, 희망네트워크 1개사를 추가 설립한다는 계획이다.
물론 이 같은 삼성의 사회 기여도가 덩치에 비해 많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다. 삼성전자의 분기별 영업이익만 5조8000억원에 달하는데 사회 공헌은 이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기업문화의 후진성과 이를 적절히 사회적 기여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우리사회의 미성숙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삼성을 비롯한 주요 그룹사들의 보다 진전된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질책하고 독려할, 그래서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멀어지는 압박의 문화도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맹목적인 비판으로 기껏 카타르시스만을 충족시키는 우리사회의 조급함이 우선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