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황민규·곽보연·염현석기자] 글로벌 경제위기의 불길이 우리나라 산업현장에도 들불처럼 옮겨 붙고 있다. 국가산업의 '심장부'로 불리는 주요 산업단지들이 최근 급격한 매출 하락을 견디지 못하고 감원·폐업하는 등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단지의 경우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기피지역'의 오명을 쓴 채 슬럼화 되기도 한다.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및 내수 활성화 등 산업단지가 경제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점에 비춰 볼 때 '산업현장의 위기'는 엄중하게 받아들여야할 경고다. 서울 온수산업단지를 시작으로 전국의 주요 산업단지를 돌며 실태를 점검했다. [편집자]
"그냥 죽지못해 사는거죠."
서울 온수산업단지에서 만난 중소업체 관계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스팔트까지 녹일 듯한 36도의 더위. 비좁은 공장에서 선풍기 한대에 의지하며 기계를 다루던 근로자 등 뒤에는 재고품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국내외 경제에 불어닥친 불황에 산업 현장은 업종을 가리지않고 모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매출이 지난해와 비교해 적게는 20%, 심한 곳은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지난달 중소제조업의 평균 공장가동률은 5개월 만에 최저수준인 70.8%를 기록했다. 수요가 위축되면서 거래처 일감이 떨어지자, 자금난에 허덕이기 시작한 중소업체들이 근로자 수를 줄이고 유휴기계를 늘린 것이다. 올들어 매출이 지속적으로 줄어 생산현장에서 그나마 있던 직원들도 떠나보내고 가족들로만 겨우 꾸려가는 공장도 있었다.
◇정부, 업종 가려 지원?..사각지대 놓인 산업단지 950여곳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지난달 '중소기업 건강도 지수(SBHI)'는 78.3점을 기록하며 지난해 같은 기간의 87점보다 무려 9.7점 낮아졌다.
중소기업 건강도지수가 100점 미만이라는 것은 전월 보다 업황실적이 악화됐음을 의미한다. 업종을 불문하고 중소제조업체의 업황실적이 지난 4월 이후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나마 전기·전자제품과 의료, 정밀·광학기기와 같은 첨단산업은 정부 차원의 제도적지원이 꾸준히 이뤄지며 8월 업황이 긍정적으로 전망됐다. 업종에 대한 정부 지원 여부, 규모 등도 업종간 극명한 대비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한편 첨단산업체의 입주비율이 82%에 이르는 구로디지털 단지는 한국산업단지공단으로부터 풍요로운 지원을 얻고 있다.
임종인 한국산업단지공단(산단공) 서울지역본부 본부장은 "구로디지털단지에 입주한 1만1000개 업체들은 대부분 첨단산업에 종사하는 중소기업"이라며 "기술개발과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클러스터 사업을 비롯해 지식산업센터를 한곳에 모은 G밸리 사업 등 불황에 부딪힌 업체들을 독려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3년전 디지털단지에 입주한 로봇제작업체 포디로보틱스는 클러스터 사업을 통해 같은 단지 내에 있는 업체들과 아이템을 공동개발하고 있었다.
박진규 포디로보틱스 연구소장은 "창업 당시에도 정부가 공장설립 비용의 70%를 지원해줬고, 디지털 단지에 입주하면서 취득세를 면제해주는 등 다양한 세제 혜택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 업종에만 주어지는 '특혜'다.
임종인 본부장은 "정부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인 산업단지가 전국적으로 950여곳에 달한다"며 "특히 대전의 1, 2 산업단지나 대구의 3단지, 전주의 1, 2단지 등 지방에 위치한 산업단지 중 지원을 못 받아 상황이 열악한 곳이 많다"고 말했다.
정부의 지원이 일부 유망업종과 지역으로 쏠리면서, 소외된 업종과 지역의 산업단지가 슬럼화 돼가고 있는 것이다.
◇산업단지 슬럼화..인근 지역경제도 연쇄붕괴
무엇보다 큰 문제는 한때 국가경제를 견인했던 서울 내 주요 공업단지의 슬럼화가 깊어지면서 지역경제권 전체의 연쇄붕괴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로디지털단지에서 차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위치한 구로공구단지와 중앙유통단지는 이같은 공단 침체 등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대표적인 산업단지다.
올 들어 중앙유통단지의 업황은 유독 참담해졌다. 입주 업체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올 6월 업체들 중 20~30%의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대비 반토막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김진식 한국산업용재 공구상협회 서부지회장은 "경기침체에 대기업까지 도매사업에 치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정부 차원의 안전망이라곤 중기중앙회에서 개최하는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 일인당 8000원씩 지원해주는 것뿐"이라고 하소연했다.
김 서부지회장은 "건설, 조선업계에 산업용재를 유통하는 이곳의 경우 국내수요침체와 유럽과 미국의 경제불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기업의 일감몰아주기로 매출 감소폭이 더욱 커졌다"고 설명했다.
일감이 줄자 업체들은 핵심인력 2~3명만 남기고 여유인력을 줄이며 생업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월세 80만원도 감당하지 못해 문 닫는 업체들이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었다.
실제 부도 처리가 되면 개인파산 신청 등으로 다시 재기의 기회가 있지만 '파산'을 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길바닥에 주저 앉게 된다.
지역경제에 드리운 불황의 그림자는 다만 중앙유통단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근 지역 근로자들이 이용하는 식당가, 슈퍼마켓, 서비스업종 등 상권 전체가 극심한 침체를 경험하고 있었다.
지하식당가의 한 식당 사장은 "한때는 식당마다 사람이 넘치고, 배달 주문도 워낙 많아 식당마다 종업원을 고용해 영업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한명은 음식을 만들고 한명이 배달하는 식으로 둘이서 일한다"고 말했다.
유통단지 인근에서 문구류와 소모성자재를 판매하는 업체 사장은 "올 들어 인근에서 문닫는 슈퍼, 식당들이 셀 수없이 많아졌다"며 "우리도 매출이 전년도의 40% 수준으로 확 떨어졌다"고 울상을 지었다.
그는 "우리도 도시락을 싸서 다니거나 매장에서 밥을 직접 해먹으며 끼니를 해결한다"며 "공구상인들도 마찬가질테니 식당들 사정이 오죽하겠냐"고 반문했다.
산업단지 침체에서 시작된 불황의 여파가 인근 유통단지의 매출 하락, 감원·폐업뿐만 아니라 지역경제 전체에 불황의 늪에 빠뜨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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