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차도살인(借刀殺人). 중국의 고대 병법서 '36계'에 나오는 말로, 남의 칼을 빌려 적을 벤다는 뜻이다.
검찰의 칼날이 이재현 CJ그룹 회장을 정조준하면서 재계에서는 '차도살인'이 조심스레 회자되고 있다. 선대회장의 유산을 놓고 법정다툼을 벌이는 등 CJ와 불편한 관계에 놓였던 삼성이 이번 수사의 배후에 있다는 일종의 음모론이다.
실제 이달
들어 검찰이 CJ그룹 비자금 수사에 전격 착수하자 재계 일각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내놨다. 이건희 회장이 입은 타격을 고려할 때 삼성이 모종의 움직임을 시작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었다.
CJ 측도 비슷한 의심의 눈초리를 내놓고 있다. 몇몇 관계자들은 기자들에게 비공식 전제를 달고 '삼성 배후설'을 제기했다. 구체적으로 삼성 측의 누가 움직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흘러 나왔다. 철저한 보복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미 검찰수사가 끝난 사안이 왜 지금에 와서 다시 불거졌냐는 데 의혹의 초점을 맞췄다. 2007년 전 재무팀장 이모씨의 청부살인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재현 회장의 국내 차명재산이 이듬해 1700억원의 세금을 국세청에 납부하는 것으로 종료된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더욱이 이번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윤대진 부장검사가 검찰 내에서도 손꼽히는 특수통으로, 기업들 사이에서는 일명 '저승사자'로 불리는 것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의 통보에 검찰이 하필 윤 검사가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에 사건을 배당했냐는 얘기다.
그의 대학 1년 선배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 교수는 윤 검사에 대해 "강골 중의 강골"로 표현하며 "그가 던지는 그물망은 촘촘하고 강력하여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속된 말로 "이번에 CJ 작살난다"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법조계 안팎에서도 CJ와 검찰과의 애증 관계를 고려할 때 더 이상 빠져 나가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사실 시기의 묘함은 있다. 청와대의 경우 윤창중 파문에 대통령의 방미 성과가 모조리 날아갔다. 국면 전환의 필요성이 있었다는 얘기다. 여기에다 경제민주화 후퇴 논란이 가중된 상황에서 재벌에 대한 단죄를 보여줌으로써 그 의지를 분명히 할 필요도 있었다. 검찰도 중수부 폐지 등 개혁 대상으로 지목된 터라 명예회복의 계기가 필요했다.
이건희 회장이 쏟아낸 일련의 발언으로 세간의 중심에 섰던 삼성으로선 호기를 맞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미 CJ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터라 적기에 힘을 쏟아 부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사실이라면 삼성은 청와대와 검찰 등 대한민국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주장이 된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SNS 등을 통해 이 같은 배후설이 급격히 확산되자 검찰은 29일 관련 내용을 공식 부인하기에 이른다. 수사 초기 간헐적으로 들렸던 음모론이 점차 확산되고, 기자들 또한 사실관계를 묻는 빈도가 높아지자 "시중에 떠도는 음모론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이번 수사는 충분한 내사를 통해 단서가 확보돼서 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배후로 지목된 삼성 역시 발끈했다.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뿐더러 그럴 힘 또한 없다고 했다. 오히려 선대회장이 물려준 유산이 부각되면서 상속재산 전반으로 수사가 확대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드러냈다. 특검을 거치는 등 곤혹을 치렀던 과거사를 굳이 꺼낼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반론이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설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때문에 다른 한편에서는 CJ의 물타기 시도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재현 회장 일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하자 반전을 위해 무리한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검찰의 칼부림 무대 뒤로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고 있다. 이를 일축시킬 수 있는 것은 검찰의 공정함 뿐이다.
한발 더 나아가 흥미를 유발하는 각종 설화에 이번 사건의 본질이 왜곡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경청해야 한다. 골목상권 침해 논란으로 경제민주화의 단초를 제기했던 유통재벌의 총수가 비자금 조성을 위해 역외 탈세 등 불법을 시도했다면 이는 그 행위 자체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는 게 이 땅의 법이자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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