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逆鱗)'. 올해 상반기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 '헐리우드 형님'들의 틈바구니에서 선전한 우리 영화 중 하나다. 1777년 7월28일에 일어났던 암살 기도사건(정유역변)을 그렸다. 암살 대상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 즉위 1년만의 일이다. 영화는 사건발생 당일을 24시간으로 쪼개 관객들을 숨 가쁘게 몰고 간다. '국민남친' 현빈의 군 제대 후 첫 작품이기도 하다.
역린이 화제가 되면서 영화 속 정조의 대사 '중용(中庸) 23장'이 주목을 받았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시작되는 이 대목은 점층적으로 의미가 커지면서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고 끝을 맺는다.
중용 23장은 단언컨대 영화 속 정조의 '주문'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뒤주 속에서 말라 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가 별렀던 세상에 대한 분노는 얼마나 참혹했을까. 왕에 올라서도 그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으로부터 갖은 위협을 당했다. 사방이 적이고, 발 닿는 곳은 죄다 벼랑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중용 23장을 주문처럼 외웠다.
분노가 차오를수록, 두려움이 커질수록 '작은 일도 최선을 다하라'는 소박한 중용 23장의 첫 문장에 그는 매달렸다. 하지만 정조의 시선은 항상 '세상을 변하게 하겠다'는 최종 목표에 고정되어 있었다.
결국 그 목표는 이뤄졌다. 정유역변을 시점으로 정조는 당파를 불문한 대소신료(大小臣僚)를 굴복시키고 개혁과 대통합으로 조선을 이끌었다. 후세에는 세종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유역변 237년 후인 2014년. 비슷한 위치에서 세상을 변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 여기 또 있다.
취임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당선무효네 어쩌네 하지를 않나, 간첩 잡는다는 국정원이 증거를 조작해 나라망신을 시키질 않나. 그것까지는 참겠다.
배가 뒤집혀 아이들이 수백명 죽어가는데 보고 하나 제대로 하는 인사가 없다. 눈물로 사과했는데도 진정성이 없단다. 새출발 해보려고 뽑아 놓은 사람들은 죄다 '불량품'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겠다. 책임지며 사퇴하겠다는 사람 겨우 말려 앉혀놨는데 또 흔든다. 탈영병 잡겠다며 출동한 군대는 자기들끼리 놀라 총격전을 벌여 장교가 총에 맞았다. 재보선 공천을 두고는 공천학살이네 뭐네 또 내 탓을 한다. 결국 71%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은 반토막이 났다.
밖에 신경 쓸 일도 한 두가지가 아닌데, 도대체 이 나라는 왜 나를 이리도 못살게 굴까.
추측컨대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적이고 죄다 내 잘못이란다'. 박 대통령은 지금 세상을 바꾸고 싶다.
앞서 역린과 중용, 정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음은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직무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최선을 다했다면 취임 이후 계속되고 있는 '환관정치'니, '만만회'니, '기춘대군'이니 하는 말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박 대통령의 노력은 부족했다. 그것은 최근 '왕기레기'라는 별명까지 붙이고 낙마한 문창극 총리 후보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내정 된 뒤에도 가정적 화법을 자주 썼다. 역사관 논란이 한창인 때도 "공직을 맡게 된다면 그에 맞는 역할과 몸가짐 갖출 것"이라며 당연한 듯 강조했다.
국가가, 국민이 원하는 총리는 준비된 총리다. "시켜주면 잘 하겠다"는 식의 무책임한 인사를 총리에 내정한 것만 봐도 박 대통령의 노력은 부족했다. 소위 '불량품'으로 불리고 있는 다른 장관후보자들도 물론이다. 부정해도 그것은 박 대통령의 책임이다.
박 대통령의 임기 만료일이 2018년 2월24일이니 아직 1333일이 남았다. 3년이 넘는다. 남은 기간을 만회할 것인지 '불안한 정조'의 심정으로 끝까지 갈 것인지 여부는 오롯이 박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이미 읽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박 대통령에게 '중용(中庸) 23장'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최기철 정치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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