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암 발병 책임' 판결..전력정책 패러다임 바꾸나
2014-10-21 17:30:01 2014-10-21 17:30:01
[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국회에서 한국수력원자력과 원자력공기업 국정감사가 열렸던 지난 17일,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에서는 원전이 지역주민의 암 발병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판결이 나왔다. 정부는 그동안 원전 지역주민의 방사선 피폭과 그에 따른 암 발생의 연관성을 부인했었는데, 법원이 정부의 입장과 반대되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에 앞으로 다른 원전 지역과 경남 밀양 등 고압송전탑이 들어선 지역을 중심으로 비슷한 소송이 줄을 잇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그동안 원전과 발전소를 지으면서 지역민에 대한 영향평가를 소홀했던 정부 정책에 전환점이 마련될지도 관심이 쏠린다.
 
17일 부산지법은 동부지원은 고리 원전 근처에서 20년을 살다가 갑상선암에 걸린  박모씨(여·48세)가 한수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한수원은 박씨에게 1500만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전의 암 발병 책임을 인정한 국내 첫 판결이다.
 
◇고리 원자력발전소 1·2호기 전경(사진=뉴스토마토)
 
이에 대해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는 "해외도 원전이 암 발병에 영향을 준다는 판결 사례는 드물고 그동안 국내의 공해소송에서는 주민이 자신의 피해상황과 공해원간 연관성을 직접 입증해야 했다"며 "정부는 원전의 안정성만 강조할 수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환경단체 등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고리 원전뿐만 아니라 다른 4개 원전 지역에 사는 주민과 암환자들에 대한 건강피해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고 정부에 구체적인 피해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고 나설 계획이다. 또 법조계와 의학계 등에도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특히 밀양 송전탑 갈등과 관련해 765㎸ 고압송전선과 송전탑에서 나오는 전자파의 위해성이 다시 한번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밀양 주민들과 환경단체 등은 "세계보건기구(WHO)는 고압송전선로에서 나오는 전자파를 발암 가능물질로 지정했다"며 "밀양 주민의 머리 위를 지나는 송전은 암과 발달장애, 우울증 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에 따르면, 국내에도 고압송전이 설치된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암이 발생한 사례가 있었다. 경기도 양주시는 양주전력소 인근 마을에서 지난 10년간 17명이 암으로 숨졌으며 충남 청양군도 전력소가 들어선 후 암 사망자가 급증했다.
 
원전 지역을 비롯해 고압송전탑이 설치된 주민들까지 정부에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하고 방사선과 전자파의 위험성을 주장한다면 지난 10년간 공급확대 전력정책을 추진하면서 지역주민의 희생만 강요했던 정부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릴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물론 이번 판결로 정부의 전력정책이 갑자기 변경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 한수원 등은  원전이나 전자파가 암에 영향을 준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번 판결에 대해서도 별도의 언급을 피하고 있다.
 
또 정부는 전자파를 발암 가능물질로 지정한 WHO 연구결과가 10년 전 내용이라 과학적 정밀성이 부족하고, 통계적으로 전력시설 주변에서 사망자와 암 환자가 많기는 하지만 과학적으로 질병에 대한 상관관계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더구나 이번 소송에서 박씨의 피해만 인정되고 대장암에 걸린 남편과 발달장애를 겪는 아들의 피해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은 논란거리다. 각종 전력시설 주변 주민에 대한 대대적인 역학조사 결과가 없어 보상문제 역시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는 점 역시 해결할 과제다.
 
◇밀양 송전탑(사진=한국전력)
 
다만 밀양 송전탑 설치 문제로 대대적인 갈등을 겪었고 강원도 삼척시와 경북 영덕군에서 원전 증설반대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에서 원전의 유해성을 인정한 판결까지 나온 마당에 정부가 더이상 밀어붙이기식 전력정책을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정의행동 관계자는 "정부가 원전은 무조건 안전하다는 주장이 깨진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안전에 대한 국민의 눈높이가 올라간만큼 정부는 주민수용성과 영향평가에 더욱 신경을 쓸 것"이라며 "탈핵 운동과 노후원전 폐쇄 운동도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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