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그리스가 국제 채권단과의 협상을 통해 구제금융 기한을 4개월 연장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직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채권단의 구미에 맞는 구조 개혁안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그리스 국민들과 일부 정치인들이 반발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제출한 긴축 개혁안이 채권단의 눈높이에 맞지 않아 협상이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그리스 구제금융 기한 '연장'..개혁안 마련 숙제 남아
파이낸셜타임즈(FT)는 지난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로그룹 회의 끝에 그리스 구제금융 기간을 4개월 연장하는 합의안이 마련됐다고 보도했다.
오는 28일에 끝날 예정이었던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4개월 뒤로 연기돼 그리스는 5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 금융 지원 없이 홀로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됐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뜻하는 '그렉시트(Grexit)' 우려 또한 일부 해소됐다. 대신 채권단의 추가 지원으로 만기가 도래한 채무를 값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싹텄다.
그리스 신정부 입장에서는 한숨 돌릴 여유를 얻은 셈이다. 이번 협상안을 살펴보면 구제금융 기한을 4개월 연장한 것 뿐 아니라 분할지원금을 제공한다는 약속도 담겨있다.
◇치프라스 총리가 그리스 내각 회의에 참석했다. (사진=로이터통신)
아울러 기초재정흑자 목표를 국내총생산(GDP)의 3%에서 하향 조정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재정흑자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면 공공 예산을 더 많이 집행할 수 있으므로 경제 성장률을 재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집권 전부터 강조해온 부분이다.
이런 내용만 보면 치프라스 총리가 구제금융 연장에 반대하던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등 트로이카 채권단을 상대로 이득만 챙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긴축 시행안 때문이다.
채권단은 협상안을 통해 그리스 정부가 긴축정책으로 재정 건전성을 강화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기한연장과 자금 제공 약속을 지키겠다고 못박았다.
물론 그리스 전 정부가 시행해 오던 식의 긴축정책을 그대로 시행하란 뜻은 아니다. 이번 긴축은 현 정부 스스로가 그 강도와 규모를 정하기로 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보통은 채권단이 구제금융 약속과 더불어 구체적인 긴축 내용을 해당 국가에 설정해 준다.
그리스 정부는 채권단의 요구를 감안해 오는 23일까지 긴축 규모와 재정 건전성 방안을 담은 개혁안을 제출할 방침이다. 여기에는 탈세와 부패 방지, 공공복지 간소화 등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구체적으로는 담배 밀반입과 탈세를 막아 일 년간 20~25억유로를 확보한다는 계획도 거론되고 있다.
이게 채권단의 동의를 얻으면 그리스는 오는 4월 말까지 72억유로를 추가로 지급받아 채무 상환 등의 급한 불을 끌 수 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개혁리스트는 채권단이 아닌 그리스 정부 스스로 작성하는 것"이라며 "그리스 정부가 승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렉시트 우려 일부 해소..금융권도 협상 타결에 '반색'
바루프키스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 정부는 이번 협상 결과에 어느정도 만족하는 눈치다. 구제금융 종료로 국가가 부도사태에 이르는 것을 막고 그렉시트 우려감도 해소했다는 점에서다.
닉 말코트지스 매크로폴리스 분석가는 "그리스 정치권 내에서는 비교적 반발이 적은편"이라며 "마놀리스 글레조스의 발언은 시리자가 유로그룹의 결정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첫번째 사례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2월 그리스 증시 추이 (자료=인베스팅닷컴)
지난 여론조사를 보면 치프라스 정부에 대한 민심이 그다지 악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지지율이 더 상승했다. 그리스 여론조사 기관이 지난 한 주 동안 대정부 지지율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0%가 현 정부의 행보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번 수치인 70%를 10%포인트 앞서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화답하듯 불안에 떨던 그리스 금융 시장도 최근 오래간만에 살아나는 모습을 연출했다. 구제금융 합의로 추가 자금 지원이 이뤄지면 은행의 자금 이탈을 말하는 '뱅크런'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기대감이 커진 덕분이다.
그리스 증시는 지난 18일까지 이번 달 들어 약 18% 상승했다. 지난 12개월 동안 55% 곤두박질친 것과 대조된다. 이달 3.5% 오르는 데 그친 독일 증시와 비교해 봐도 엄청나게 호전된 수치다.
지난 22일 미국 증시도 그리스 협상 타결 소식에 일제히 상승했다. 다우지수는 1만8140.44로 마무리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정치권 내부서 협상안 반대 의견 '대두'..그렉시트 우려 상존
그러나 금융권과 달리 이번 협상을 두고 '배신'이라는 격한 단어까지 사용될 정도로 정치권 내부에서는 반대 의견이 격하게 제기되고 있다.
한 그리스 정치인은 "현 정부는 트로이카의 협박에 굴복하고 우리를 배신했다"고 말했고 일부 급진좌파 의원들은 "치프라스는 당 중앙 위원회에 협상 내용을 미리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스의 대나치 투쟁 레지스탕스 영웅인 마놀리스 글레조스 시리자 의원은 "생선을 고기로 불렀을 뿐 실제 협상 내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긴축을 완전히 폐기하겠다던 치프라스 총리가 은근슬쩍 기존의 공약을 뒤로하고 긴축 일부 수용으로 방향 선회를 했다는 지적이다.
국민들의 반발도 예상된다. 지난 총서에서 치프라스가 이끄는 극진좌파 정당 시리자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긴축 폐기 공약이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볼프랑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그리스 정부는 국민들을 설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긴축 운동을 주도했던 치프라스 총리도 "전투에 승리했지, 전쟁에 이기지는 못했다"며 이번 협상의 한계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아울러 일단 협상에 도달하긴 했지만, 아직 마음을 놓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리스가 제출한 개혁안이 채권단의 구미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오는 24일 유로존 재무장관들이 재차 회의에 돌입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그리스 구제금융은 28일부로 종료된다. 이러면 그렉시트 위기가 재부각 되면서 금융권이 흔들릴 여지가 크다.
게다가 치프라스 총리가 연금 확대 방안을 고집하고 있어 개혁안 통과 가능성을 낮추고 있다. 연금 확대 방안은 채권단이 꼭 없애야 한다고 지목한 정책 중 하나다.
폴커 카우더 독일 보수연합 원내대표는 "그리스는 지금 당장 숙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며 "그래야만 부채 상환 기일을 뒤로 미룰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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