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는 “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오늘의 한국은 위기를 넘어 파국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여야 정치권과 재벌대기업 등 지배세력들은 한국 사회의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어떤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청년실업률은 12.5%로 역대 최악의 상황이고, 가계부채는 눈덩어리처럼 증가해 1207조원이 됐다. 채무상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계가구도 158만3000가구로 그 비중이 14.8%에 달한다. 생활고를 비관해 목숨을 끊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은 하루 걸려 사회면을 장식하고, 사라지지 않은 갑을관계에 얽매인 영세·중소기업들과 비정규직노동자들은 하루살이 목숨이다. 직장에서 쫓겨난 베이비붐세대(1955-63년생)들도 자영업의 무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교적 창업이 쉬운 외식업과 소매업에 몰린 이들의 폐업률은 무려 43%에 달한다.
상황은 악화하고 있는데 이를 바로 잡아야 할 정치·경제 지도자들의 행태는 퇴행적이다. 족벌경영에 대한 비난에 아랑곳 않고 두산그룹은 4세 경영시대를 열었다. 고용안정을 도모해야 할 대기업들은 해고의 자유만을 부르짖는다. 국민의 삶을 보듬어야 할 정치는 70년대로 역주행하고 있다. 공천혁명을 이야기했던 양당의 국회의원 후보 선출 과정은 허약한 정당 민주주의의 몰골을 그대로 보여준다. 진박(진실한 친박)을 가리는 것이 공천의 잣대가 된 새누리당, 친노 배제가 원칙이 된 더불어 민주당, 제3당의 깃발만 있지 내용이 없는 국민의 당 모두 ‘도토리 키 재기’다.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민중연합당으로 분열된 진보진영도 남 탓할 때는 아니다.
여야 정당 간 집안싸움은 국민의 피해로 고스란히 돌아온다. 4·13 총선의 승자가 누가 될지 예단할 수 없지만 여야 공천 결과는 세대교체도 세력교체도 아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더 큰 문제는 20대 국회의원 총선이 공약 없는 선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대결 격화, 사회적 불평등 심화, 가계부채 폭등, 민생과 노동의 위기를 타개할 각 정당의 정책이 무엇인지, 그 공약이 실현 가능한지가 사회적 의제가 되지 않고 있다.
정책 및 공약의 실종은 각 정당들의 능력 부재와 함께 기득권 유지의 결과물이다. 이슈 없는 선거판은 현상유지이고 지역대결의 장을 뛰어 넘을 수 없다. 혁신과 변화는 없고 꼼수와 편법이 선거를 좌우한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깨기 위해서는 총선을 정책경쟁의 장으로 바꿔야 한다. 누가 후보가 되는가도 중요하지만 각 정당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공약이 분명해야 토론이 가능하고 심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청년층의 낮은 투표율을 탓하지 말고 청년을 위한 공약을 제시해야 한다. 청년들의 최대 관심사인 일자리 창출 대안과 만성적 청년실업 해소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미국 대선은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샌더슨 돌풍의 원인 중 하나로 사회개혁의 뚜렷한 비전과 혁신적인 공약이 꼽힌다. “내 계획은 월가의 대형은행과 수익을 많이 내는 기업, 백만·억만장자들이 정당한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이다. 또 근로자들에게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제공하며 여성들에게 동등한 임금을 보장하는 것이다. 1조달러의 세금을 걷어 이를 사회기반시설 확충, 대학 등록금 무료화, 최저임금 인상, 사회보장 혜택 강화, 처방약값 인하 등에 사용할 것이다.” 물론 샌더슨 공약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샌더슨에 대한 비판은 다시 비판자의 몫으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당신의 대안은 무엇인가.
한국 사회의 구조화된 기득권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발본적이고 창의적인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18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당시 손학규 후보의 ‘저녁이 있는 삶’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으로 신음하는 한국 사회의 본질을 지적했고, 샐러리맨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헬 조선’의 부정의 대한민국이 아닌 희망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 오후 5시 퇴근법, 최고임금제 도입, 청년수당(배당)제 전면 확대, 비정규직 사회보험 국가부담 확대,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 등은 어떠한가. 정치가 달라져야 경제가 살고 민생이 피고 국민이 행복해진다. 절망을 넘어서 분노가 언제 터질지 모를 위험한 상황이다. 깨어있는 국민이 정치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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