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증권가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몇 년째 지속된 구조조정 칼바람에 몸을 사렸던 증권맨들은, 이제는 저성과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2주 후면 여의도 윤중로에 벚꽃이 피지만, 생존을 위협받는 와중에 꽃놀이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올해 초 IBK투자증권은 ‘저성과자 해고’가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의 취업 규칙을 금융권 최초로 시행했다. 경영이 어려워져 어쩔 수없이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업무 성과 부진을 근거로 들어 합법적으로 직원을 해고해도 문제가 없도록 규정을 만든 것이다.
이미 증권사들은 방문판매(ODS)부서 전출이나 전략적 성과관리 프로그램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희망퇴직을 거부하거나 노조를 설립하는 식으로 회사 입장에서 ‘거슬리는’ 직원 퇴출을 종용해 왔다. 이들 증권사에게 이제 ‘합법’이라는 이름의 무기까지 선사된 셈이다. 문제는 저성과자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데 있다. 저성과자 기준의 하나인 ‘근무태도 불량’의 경우 눈엣가시인 직원을 몰아내자면 적용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증권유관기관도 성과주의 태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달 유재훈 예탁결제원 사장은 “성과주의 문화를 조직에 정착시키지 않고서는 발전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며 “성과 연봉제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권고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성과주의 문화를 확신시키겠다”는 말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박 정부의 성과주의 방침에 앞장서는 일부 금융권 수장들을 가리켜 ‘정치권 입성을 노리고 직원들을 희생시키는 것 아니냐’며 불편한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성과주의 바람만 직원들을 옥죄는 것이 아니다. 증권사 인수합병(M&A)전 한복판에 몰린 피인수 대상 증권사 직원들이 느끼는 불안도 만만치 않다. M&A가 성사된 후 업무가 중복돼 우선순위에서 밀리면 원래 있던 자리를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지난 25일 마감된 현대증권 매각 본입찰에 한국금융지주와 KB금융지주, 홍콩계 사모펀드 액티스가 출사표를 던진 가운데, 현대증권 노조는 “한국금융지주로의 매각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금융지주가 현대증권 조합원의 생존과 영업권에 대한 보장은 커녕 피인수 회사의 인력을 내보낼 것”이라고 우려하며 한국금융지주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될 경우 인수 반대 투쟁에 나설 것을 예고하기도 했다.
여의도 이곳저곳에서 벼랑 끝에 선 증권맨들의 절박함이 엿보인다. 직원들의 불안이 깊어질수록 회사의 성장과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 증권사의 오래된 주주 A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봐야 할 때다. “조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직원들의 '주인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봅니다. 직원들 머릿속에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조직이 와해되는 건 시간 문제 아닙니까.”
이혜진 증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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