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최순실 이야기다. ‘이게 나라인가’라는 탄식이 시나브로 분노로 표출된다. 야권의 대선 후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정국이다. 국민의 분노, 무너진 자존심과 허탈감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나. 우회로는 없고, 정도가 답이다.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책임자를 처벌하고,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을 끊을 법·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제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도입은 그 시작이다.
우려할 점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최순실 개인에게 덮어씌우고 가해자들이 피해자 행세하는 꼴이다. 대통령은 두 번이나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으나, 국민들은 더 이상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박근혜 게이트가 아닌 최순실의 개인 일탈로 몰아간다. 대통령과 공동운명체인 새누리당은 자기들 책임이 아니라며 선 긋기에 나선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사태 파악이 안 되었는지, ‘부족한 사람이지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읍소한다. 구렁이 담 넘듯 사태를 봉합하려 하나, 빈약한 수습책은 국민의 저항만 불려올 뿐이다. 지난 주말 서울 도심 집회 참석자 수는 15만명을 넘어섰고 그 중 상당수는 청년과 중고등학생이었다. 제2의 4·19가 연상되는 긴박한 상황이다.
정경유착과 권력게이트에는 언제나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 있다. 재벌대기업의 이익 대변기구인 전경련이다. 전경련은 미르·K스포츠재단에 부패한 뒷돈을 댄 파이프라인이었다. 검찰 수사에서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은 발언을 뒤집었다. 모금은 전경련의 자발적인 의사가 아니라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고백했다. 창조경제와 문화창조를 위해 재계 스스로의 결정으로 돈을 모아 재단을 설립했다고 강변했던 전경련이 갑자기 피해자 코스프레에 나선 것이다.
전경련이 대기업과 정치권력 간 검은 돈의 연결벨트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경유착을 통한 재계의 이익 대변은 설립 이후 현재까지 지속된 전경련의 진짜 역할이었다. 전경련은 80년대 전두환 일해재단 자금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 비자금 재공을 비롯해 1997년 세풍사건,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의혹에 연루된 이력이 있다. 2010년에는 ‘박정희 기념사업관’ 건립 기금 270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에 공문을 보낸 사실도 있다. 우익단체인 어버이연합에 자금을 제공하여 벌인 관제시위 실상도 백일하에 드러났다. 열거한 사례들은 외부로 드러난 일부 사건에 불과하다. 전경련과 정치권력이 구중궁궐에서 벌인 야합과 협잡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박근혜 권력게이트의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자 대기업들은 부당한 권력에 돈을 갈취 당한 피해자로 얼굴을 바꾼다. 가뜩이나 경제도 어려운데 돈 뜯기고 검찰 조사까지 받을 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런데 곱씹어 생각해 보자. 한국 대기업들이 그렇게 약한 존재들인가. 대통령의 권력은 유한하지만 재벌권력은 무한하다. 손해 볼 일 절대 안 하는 것이 장사치의 생리다. 돌아오는 이득을 판단하였기에 재단에 뒷돈을 대는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재벌들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돈을 투자한 그 시기에 박 대통령은 재벌들의 숙원사업 해결을 위해 더욱 열성적으로 나선다. 서비스산업 발전 기본법과 5대 노동개악법 처리가 국정의 으뜸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재벌과 정치권력의 끊어지지 않은 정경유착, 권력 사유화와 민주주의 파괴가 이번 사건의 본질이다. 재벌 입장에서 몇 십억원쯤이야 보수정권과 자유시장경제의 유지를 위한 윤활유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자정기능을 상실한 전경련은 해체되어야 한다. 과거 숱한 정경유착과 비자금 사건 등 불법·비리가 드러날 때마다 전경련은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말짱 도루묵이었다. 전경련의 정관 제1조에는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올바른 경제정책 구현과 우리 경제의 국제화를 촉진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권력의 자금조달처로 전락한 전경련은 스스로 자유시장경제를 파괴한 주범으로 스스로의 존재 기반과 가치를 허물었다. 회원사들의 묵인과 방조 속에서 전경련은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여의도의 50층 전경련 건물은 한순간 무너지는 바벨탑이 될 수 있다.
전경련 스스로 해체의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청와대를 향한 원성은 재벌대기업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전경련 해체와 함께 재벌대기업들은 스스로 범죄를 고해성사해야 한다. 그 길만이 살 길이며,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법이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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