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기다려라”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 중 하나가 “기다리라”라는 말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오지 말고 배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라”라는 안내방송을 믿은 승객들은 침몰한 세월호 안에서 아직도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승무원들의 잘못된 대응으로 승객들은 탈출기회를 놓쳤고, 이는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고 절망케 했다.
문제는 이러한 안전시스템의 배신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전동차 방화사건 때에도 기관사가 “전동차 안에 대기하라”는 방송으로 피해를 키웠다. 전동차에서 기다리다 화재는 커져 끝내 출입문은 열리지 않았고, 화재 사망자 192명의 74%인 142명이 그릇된 안내방송 탓에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두 차례의 참사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큰 상처를 남겼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비상상황에서도 “기다리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됐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5월 서울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열차 추돌 사고 때도 승객 대부분이 “밖으로 나오지 말고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을 따르지 않고 객차에서 탈출했다.
지난해 1월에는 서울 지하철 4호선 열차가 한성대입구역과 성신여대입구역 사이 터널에서 갑자기 멈춰서자 승객 800여명이 전동차 문을 강제로 열고 빠져나와 선로를 따라 걸었다.
아수라장 같은 현장상황이야 이해가 되지만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질서한 자력 탈출은 자칫 2차 사고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 불과 한 달 전인 지난달 22일 오전 6시28분 서울지하철 2호선 잠실새내역으로 진입하던 전동차에서 불꽃과 연기가 일면서 전기가 끊겨 전동차가 멈춰 섰다. 1분 뒤인 6시29분 객차 내에 “차량 고장으로 비상 정차했으니 안전한 차내에서 기다려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갔고, 승무원은 상황을 확인한 후인 6시31분 안내방송과 함께 승객을 대피시켰다.
하지만 이번 사고에서도 연기를 본 승객들은 대피 방송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수동으로 출입문과 스크린도어를 열고 열차를 빠져나갔다. 당시 차량 일부가 터널 안에 정차한데다 맞은편에 차량이 다니는 만큼 승무원의 상황 통제 이전에 임의로 행동하는 자력 탈출을 트라우마에 기인한 행동이라고 무조건 옹호하긴 힘들다.
외국의 경우도 자력 탈출이 아닌 “기다려라”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일본 도쿄메트로 안내방송 매뉴얼은 화재 발생 시 ‘만약 기차가 터널 내에 정차한 경우 함부로 차 밖으로 나오지 않고 승무원의 차내 방송에 따르십시오’라고 명시했다. 나고야 교통국 매뉴얼도 터널 내에서 전동차가 정지하고 움직일 수 없을 때에는 ‘승무원이 안내를 유도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잠시 머무르시고 지시에 따라 행동해주세요’라는 안내하고 있다. 영국 런던교통국은 ‘직원이나 응급서비스로 떠나라는 지시가 없는 한 기차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라고 승객들에게 안내하고 있다.
하루에만 1200만명이 이용하는 서울지하철은 1974년생으로 곳곳이 성한 데가 없다. 1~4호선의 평균 사용연수는 16.9년에 달하면서 2011~2015년 동안 발생한 55건의 서울 지하철의 운행 중단 사고 중 1∼4호선에서만 35건이 발생했다. 앞으로도 지하철을 비롯해 생활 곳곳에서 사고는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사고를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상상황시 행동할 수 있는 매뉴얼과 교육·훈련을 보완해 믿을 수 있는 시스템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비상상황이 닥쳐도 트라우마 대신 “기다리라”는 상황통제를 믿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언제까지 자력탈출로 각자도생하는 삶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박용준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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