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1989년은 가수 윤종신(51)이 눈을 반짝이며 가요계에 데뷔한 해다. 88올림픽 전후 민주화, 세계화 물결이 밀어 닥치고, 대학에 입학해 어안이 벙벙하던 시기. 기타를 치면서 인생을 헤매던 이 청춘은 우연히 가요제에 나갔고, '감각의 음악'으로 금상을 타게 됐다.
"재수나 할까, 군대나 갈까 고민하며 방황하던 시기였어요. 가요제 이후 015B와 연결이 됐고, 그게 또 신해철, 조용필 선배님까지 이어지면서 제 인생이 실타래 풀리 듯 풀려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그 때는 제 안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펼쳐보였던 나이였던 것 같아요."
2019년은 가수 윤종신이 '두 번째 서른'을 맞은 해다. 1999년 물리적 나이로 30대 문지방을 넘은 그는 올해 가수 나이로 다시 '이립(而立)'에 당도했다. "서른을 넘기면서부터는 음악 활동이 '감각'에서 '생각'으로 전환됐던 것 같아요. 내가 할 말이 생기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식으로요. 진짜 내 것이 우러 나오기 시작하는 때가 저는 30대부터라고 생각해요."
2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스트라디움에서 열린 '빈폴X월간윤종신 뮤직 프로젝트 제작발표회'. 사진/HNS HQ
2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스트라디움에서 열린 '빈폴X월간윤종신 뮤직 프로젝트 제작발표회'. 가요계 데뷔 30주년을 맞은 가수 윤종신이 새로운 '이립'의 힘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가수 김광석이 '서른 즈음에'로 30세에 이른 청년의 깊은 고민과 사색을 말했다면, 그는 서른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다. "저는 그때가 진짜 자신의 '멋'이 나오는 시기라 생각해요. 진짜 멋쟁이의 시작이죠."
그의 말대로 '멋'과 '서른'이라는 주제가 이번 프로젝트의 전체를 관통한다. 데뷔 30주년을 맞은 그는 올해 만으로 서른을 넘긴 후배가수들과 협업했다. 후배가수 태연, 장범준, 어반자카파와 각각 작업한 곡들을 오는 6월까지 매달 한 곡씩 발표한다. 모두 윤종신이 데뷔했던 1989년에 발표됐던 곡들의 리메이크 버전이다.
프로젝트는 이날 윤종신의 신곡 '멋' 발표로 시작한다. 이어 장범준이 사랑과평화의 '그대 떠난뒤', 태연이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어반자카파가 김완선의 '기분 좋은 날'을 각각 4~6월 중 발표한다. 7월 4주차에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뮤지션들이 '이제 서른'이란 타이틀로 합동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멋'은 윤종신이 직접 작사, 작곡하고 노래까지 부른 곡이다. 레트로한 시티팝 사운드가 경쾌하고 밝은 정서를 머금고 있지만 가사 내용은 다소 현실적이고 가볍지 만은 않다. '멋져 지긴 정말 힘든 세상'이지만 그는 '스스로를 사랑해보라'고 말한다. 마음 만은 '짜치게 살지 말아보라'고 권한다. '서른에게'라는 부제처럼 힘든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청춘들을 향한 곡이다.
2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스트라디움에서 열린 '빈폴X월간윤종신 뮤직 프로젝트 제작발표회'에서 윤종신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HNS HQ
"제가 서른이었던 1990년대는 조금 널널한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멋을 부리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오히려 실속을 챙기던 이들을 좋게 보고 그런 측면이 있었죠. 그런데 요즘은 정반대인 것 같아요. 대부분이 실속파고, 경쟁적이고, 손해 보지 않으려 해요."
"멋이라는 게 꼭 옷 잘 입고 머리를 멋있게 하라는 건 아니에요. 조금 뒤쳐져도 되고, 양보하고 그런 모습들까지도 아우른다고 생각해요. 조금만 멋있게 살아도 남을 미워하는 일도 덜해질 것 같거든요. 조금 헐거워도 괜찮을 것 같다는 표현을 찾다 '짜치게 살지마'란 말이 딱이라 생각했어요."
데뷔 30주년을 맞은 그는 다른 가수들처럼 '음악 외길' 인생 만을 걷진 않았다. 뮤지션 외에도 소속사 대표이자 예능 방송인으로 활동해왔고 최근에는 레스토랑 경영까지 나섰다. 인생의 여러 굴곡진 길들을 걸으며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음악을 놓지 않겠다'는 신념을 저버리진 않았다.
'히트곡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슬럼프를 겪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2010년부터 매월 음악을 발표하는 '월간 윤종신'을 시작했고 활력이 생겼다. 이 프로젝트는 세로줄 세우기에 여념 없는 오늘날 음악 차트와 정반대의 길을 목표로 한다. 자신이 발표하는 곡들과 좋은 곡들을 소개하는 창구로서 이 플랫폼에 놓이는 모든 노래들은 '평형'을 이룬다. 장기적으로 국내 음악계가 가야할 방향을 그는 이 안에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가수 윤종신과 태연, 장범준. 사진/HNSHQ
"'월간윤종신'은 자구책이었고 창작자로 살아남는 방법이었습니다. 제가 걸어온 음악 인생 얘기와 이 업계를 가야할 사람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다수의 사랑을 받는 소위 '주류' 음악이 살아남는 환경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걸 뚝심 있게 가는 길을 가는 것도 중요함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제는 언론이나 플랫폼이 대중 개개인의 취향을 찾아주면서 기존 차트들을 고루 펴주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저는 대중의 눈치를 안보고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월간윤종신' 안에서 했는데, 돌아보면 성과에 상관없이 즐거웠습니다. 그런 환경을 조성해야 앞으로 차트 순위에 휘둘리지 않고 창작물을 내는 창작자들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년을 준비해도 하루 만에 음원차트에서 없어지는 오늘날 음악 환경을 두고 그는 "말도 안된다"고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태연 역시 "1시간 안에 우리의 노력이 그렇게 된다는 게…"라며 공감했고, 윤종신은 이번에 발표될 프로젝트의 곡들은 "호흡이 긴 음악, 내년까지 불려지는 음악이었으면 한다"는 소망을 더했다.
어반자카파. 사진/HNSHQ
이날 발표회에 함께 참석한 후배 가수들은 서른에 대한 자신 만의 의미도 얘기했다. 태연은 "어렸을 때와 달리 인생에 정답이 뭘까 혼란스러운 나이가 서른이라 생각한다"며 "하지만 (윤종신) 선배님의 프로젝트에 용기를 얻게 됐다. 아직 스스로를 찾고 있는 단계이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는 음악적 도전을 이어갈 계획"이라 말했다.
장범준은 "결혼 이후에도 왕성하게 음악 활동을 하는 (윤종신) 선배님을 보며 꼭 만나야 될 분이라고 생각해왔다"며 "하림의 '출국'이나 '난치병' 등의 가사들을 들으며 존경해왔고 꼭 조언을 받아보고 싶었다. 그동안 음악계에서 교류가 없는 생활을 해왔는데 벽을 허물고 물어보면서 앞으로의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어반자카파의 조현아는 "저 역시 서른이 되면서 생각이 많아지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며 "하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길들을 보면 모두 스스로 선택한 부분이라 소중하게 느껴지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소감을 전했다.
함께 협업한 후배가수들이 제 각기 서른에 관한 생각의 겹을 쌓았고, 그것이 다시 데뷔 30주년을 맞은 윤종신에게로 향했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음악적 고민이 많다', '방향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이들에게 그는 툭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 주듯 마지막 말을 건넸다. "너무 멀리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짧게 짧게 보다 보면 그래도 꽤 잘 살아왔더라고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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