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노동과 삶의 기록, 스베따 씨의 ‘근로수첩’
이름도 정감 있는 ‘마마’ 마을에서 여름 한철 아르바이트를 위해 알혼 섬으로 온 스베따 씨는 자신의 차를 배에 실어 강을 따라 이동해 왔다고 했다. 처음엔 작은 캠핑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음식 그림들이 그려진 게 푸드트럭처럼 보인다. 뒤쪽 모서리가 찌그러진 그녀의 낡은 노란 차는 ‘여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노동 수단이다. 그 차를 내가 캠핑카로 느꼈던 것은 아마도 스베따 씨의 쾌활하고 즐거운 기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60년생인 그녀는 은퇴한 연금생활자인데 활력이 넘친다.
스베따 씨는 15세 때 배의 요리사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대가족이거나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을 국가가 원조했어요.” 소련 정부의 그런 정책 덕분에 그녀는 같은 해인 1975년 국립중등직업기술학교(30번)에 입학해 1978년 졸업했다. “잠깐만요!” 자신의 인생담을 풀어 놓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무언가를 후다닥 가져온다. 구소련의 국장(國章)이 그려진 초록색의 작은 책자에는 ‘트루다바야 크니쉬까’(근로수첩)라고 쓰여 있고 스베따 씨의 근무 경력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죽 적혀 있다.
스베따 씨의 근로수첩. 구소련의 국장(國章)이 그려져 있다. 사진/필자 제공
이 작은 책자는 그녀의 한평생 노동을 입증하는 국가의 공식 기록이다. 그녀는 직업기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국영상점의 판매원으로 일을 시작해 지역과 업종의 변화를 겪으며 2016년 은퇴했다. 결혼으로 인해 성이 바뀌고 근무 지역을 옮기게 된 내용도 적혀 있다. 책자에 기록된 그녀의 근무 기간은 38년이지만, 15세 때부터 일한 걸 포함하면 41년이다. “이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어요.” 내가 그녀의 근로수첩에 감탄을 하자 스베따 씨가 말한다. 하지만 근무 경력과 수상 기록을 설명하는 그녀의 어조와 표정에는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긍지가 엿보인다.
“러시아로 바뀐 뒤에도 이런 근무수첩을 주나요?” “지금도 주지만 거기에 아무 것도 안 쓰니까 아무 의미가 없어요. 요즘은 컴퓨터에 다 있지요. 하지만 컴퓨터가 고장 나면 기록을 다 잃어버릴 수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여기에 쓰는 걸 더 믿어요.” 문득 우리 사회의 수많은 퇴직자들을 떠올린다. 열심히 일한 수십 년의 세월이 컴퓨터에서 출력되는 한 장의 경력증명서로 수렴되는 시대에, 사회주의 소련과 자본주의 러시아를 거치면서 손으로 쓰여 온 이 작은 수첩이 내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근로 내역을 보여주는 문서라기보다, 한 사람의 정직한 노동의 삶이 담긴 기록이고 이제는 사라져가는 소련 시대의 역사적 ‘아카이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스베따 씨가 자신의 근로수첩을 설명하고 있다. 국립중등직업기술학교(1975~1978) 졸업과 1978년 판매원 근무 시작 등의 기록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워킹맘’의 보편성
스베따 씨의 얘기를 좀 더 하자. 큰 딸이 두 살이던 1982년, 그녀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이르쿠츠크국민경제연구소(현 바이칼국립대학)에 입학해 다시 학업을 시작했다. 1987년 졸업과 함께 이르쿠츠크 주의 북쪽으로 이주한 그녀는 곧바로 소련 정부로부터 아파트를 받았고 운모(雲母)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육아, 학업, 일”(순간 큰 숨을 쉬며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공부하고 일했습니다.”
그녀와의 대화 덕분에 나는 우리 사회의 워킹맘들을 생각했고 오래 전의 몇몇 기억들을 떠올렸다.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면 여성 해방도 뒤따라올 줄 알았던 우리들은 1990년대 초 러시아에서 맞닥뜨린 러시아 여성의 현실에 놀라고 실망했었다. 러시아어 수업을 진행하던 한 젊은 강사는 퇴근 후 자신이 가사에 전념할 때 남편은 TV만 보면서 ‘신문 가져와라, 뭐 가져와라’ 시킨다고 탄식했다.
나는 전차와 트롤리버스 운전기사들의 다수가 여성인 점에 신기해하기도 했고, 길거리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중장년 혹은 노년 여성들의 푸른 핏줄이 얼기설기한 부은 다리를 보며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그녀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무거운 짐이 한가득 들려져 있었다. 3월 8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라는 것을 1992년 거리 곳곳에서 꽃을 들고 다니는 러시아 남성들을 보고 처음 알았지만, 그 날 이외에 러시아 여성들의 처지가 우리보다 나아 보이진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은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노동권을 부여했으나 집안일은 그대로 남아 결과적으로 이중의 부담이 되었다는 게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수문(水文)기상관측소가 있는 우주릐 마을에서 만난 젊은 부랴트 여성. 어린 아기를 돌보며 기념품을 파는 워킹맘이다. 사진/필자 제공
또 하나의 기억은 이 연재의 4회 때 언급했던 소련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1979)이다. 영화의 1부는 미혼모가 된 공장노동자 까쨔가 홀로 갓난아기를 키우며 밤에 졸면서 공부하는 모습,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들어 숨죽여 우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2부는 알람 소리와 더불어 생기발랄하게 모스크바의 아침을 여는 그녀의 스무 살 된 딸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영화는 그 사이의 시간을 보여주지 않지만 까쨔가 겪었을 20년간의 힘든 세월은 1부의 마지막 장면으로 충분히 공감될 수 있다.
스베따 씨는 남편과 19년을 함께 살았으니 영화와는 다른 상황이었겠지만,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세 딸과 아들 한 명 모두 잘 키워낸 자신에게 흡족해하고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이제는 연금생활자지만, 알혼 섬에 차를 끌고 와 간이식당을 연 것처럼 그녀는 여전히 일을 한다. “늙은 사람은 일터에서 받지 않아요. 누가 늙은 사람을 필요로 하겠어요... 내 나이의 사람을 누가 쓰겠어요. 마흔 살까지는 데려가지만 그 이상이면 안 데려갑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뭘 축적했는지, 자식은 뭔지...”
스베따 씨가 만든 생선 '오물' 요리. 사진/필자 제공
소련에서 러시아로, 3대의 이야기
성찰 끝에 그녀는 자신이 직접 운항하던 디젤선을 큰사위와 외동아들에게 넘겼다. “젊은이들이 일하게 하자, 생각했어요. 그들은 돈이 없어 배를 살 수 없으니 내 배를 줬지요. 자기 사업은 일한 만큼 자기 걸로 버니까요. 그리고 나는 차를 사서 이 일을 시작했지요.” 그녀의 맏딸은 ‘황금펜 상’을 받은 기자이다. 그 딸의 남편이 새 선장이 되었고, 월급이 적어 비행사 직업을 그만둔 아들이 매형을 도와 배로 가스와 석유를 운반한다.
스베따 씨의 야외 식당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왼쪽부터 스베따, 베라, 꼴랴 씨. 사진/필자 제공
스베따 씨의 연금은 월 1만4000루블, 약 26만원이다. 네 자녀를 키운 방 4개짜리 170제곱미터(약 51평)의 큰 아파트를 여전히 소유하고 있어 그녀의 연금은 전기, 가스, 전화 등 유지비로 거의 다 사용된다. 아파트를 팔거나 교환할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익숙해진 환경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스베따 씨는 일할 힘이 있는 동안은 계속 일하겠다고 말한다. 그녀가 근로수첩을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은 이르쿠츠크 시에서 연금을 수령하러 다닐 때 젊은 여성 근무자가 연금 산정을 바르게 못한 것 같아 언제든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1990년대에 나의 엄마는 연금을 받지 못했어요. 엄마의 근로수첩은 크기가 더 작고 두꺼웠지요.” 스베따 씨의 어머니는 독일과의 전쟁(제2차 세계 대전) 때 다친 ‘전쟁 아동’이다. 흑해 크림반도의 께르치 출신인 그녀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여섯 살이었다. 그때 다른 이들은 모두 총을 맞아 죽고 지하 굴에 숨겨져 있던 그녀 혼자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엄마는 여든넷인데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예요. 일거리가 없고 이런저런 게 없었던 시절도 잘 견뎌냈죠.” 굳센 어머니, 강인한 여성상이 물론 구소련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쟁을 겪은 우리네 어머니들도 그러했다.
1990년대에 연금을 받지 못했다는 스베따 씨의 어머니처럼, 종전 후 1950~1960년대 성실한 노동으로 소련 경제를 발전시켰던 그녀의 세대는 장·노년에 접어들어 적은 액수의 연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당시 내가 러시아인들로부터 가장 자주 듣던 단어가 ‘연금’이었다. 1990년대의 혼란은 스베따 씨가 사는 마마 마을도 비껴가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선 다시 얘기하기로 하자.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는 교사 베라 씨와 그녀의 남편인 쾌활한 스쿨버스 운전기사 꼴랴 씨, 운모공장에서 일했던 강인한 인상의 스베따 씨, 겸손한 부랴트 운전기사 아유르 씨, 곳곳에서 정직한 노동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알혼 섬에서 만난 것은 행운이다. 아! 또 있다. 숙소인 게르에서 만난 따냐 씨와 그녀의 딸 크세니야, 그들은 크라스노야르스크 출신이다. 그러나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 요리사로 일하고 대학 1학년생인 딸은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공부한다. 생애 첫 모녀여행을 위해 이르쿠츠크에서 만나 함께 왔다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 밤이 깊어간다.
몽골인들의 이동식 천막집인 게르 형태로 만든 숙소에서 함께 머문 따냐 씨와 그녀의 딸 크세티야는 첫 모녀여행 중이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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