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일본 구마모토현 야츠시로에 위치한 'Jazz First'. 사진/고희안트리오
우리는 잠시나마 ‘시간 여행자’가 되기로 했다. 지난해 6월30일, 일본 구마모토현 야츠시로에 위치한 재즈클럽 ‘Jazz First’로 시계태엽을 되감았다.
화려한 느낌의 외양과 판이하게 다른 내부에선 미국 뉴욕의 유서 깊은 몇몇의 재즈클럽이 겹쳐 보였다. 세월이 묻어나는 특유의 고풍스러운 공간과 적재적소에 배치된 악기들, 습도까지 신경 쓴 미세한 튠 조율, …. 고속도로 통제에도 폭우를 뚫고 온 30~40여 관객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특히 도심 외곽 지역인 이 곳에 “한국 뮤지션이 온다”는 소식이 퍼지자 일종의 지역 축제 같은 무드까지 형성됐다.
공연 첫 순서는 살랑살랑 춤추며 분위기 띄우기 좋은 스윙곡. 곳곳 술잔이 부딪히고 재즈 팬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어지는 비밥과 살사, 뉴올리언즈필 연주들…. 별도 확성장치를 쓰지 않은 악기 본연의 울림이 폭우로 축 가라앉은 분위기를 일으켜 세웠다. 한국에서부터 동행한 전문 엔지니어, 공수한 장비로 이 1시간 남짓한 라이브 실황을 관객 함성만 제하고 그대로 녹음했다. 이후 믹싱과 마스터링을 거친 고희안트리오의 정규 5집(‘Live at Jazz First’)이 1년여 만에 세상에 나왔다.
지난해 6월30일 일본 구마모토현 야츠시로 'Jazz First'에서 열린 고희안트리오의 공연. 이날 라이브 실황을 녹음해 최근 5번째 정규 앨범 'Live at Jazz First'를 발표했다. 사진/고희안트리오
다시 시계태엽, 앞으로. 10일 서울 선릉역 근처에서 만난 고희안트리오는 이번 작업에 대해 “무작정 좋은 앰프와 좋은 음향설비를 쓴다고 해서 좋은 소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란 걸 다시 한번 느꼈다”며 “(‘Jazz First’는) 사운드의 집중, 규모 측면에선 ‘빌리지뱅가드’ 같은 미국의 전통 있는 재즈클럽과 다를 바 없었다. 정돈된 악기조율과 배치가 트리오의 소리와 잘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뿌듯해 했다.
이 곳에서 녹음해 지난달 16일 발표된 ‘Live at Jazz First’는 한국 트리오 최초의 일본 재즈클럽 라이브 실황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앞서도 트리오는 두 개의 스탠더드 앨범 외에 ‘A Land of Blue Sky’, ‘Dancing Without Moving’ 등 자작곡 중심의 실황 앨범을 꾸준히 내왔다. 트리오의 리더이자 브레인 고희안은 “재즈는 본래 라이브 현장의 생생하고 역동적인 에너지와 분리해서 갈 수 없다”며 “피아노·베이스·드럼이 흡사 대화를 나누듯 연주를 주고 받는 ‘인터플레이’를 극대화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또 “최근에는 틀린 모습까지 자연스럽게 담자, 그래야 재지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고희안. 사진/고희안트리오
고희안이 주 선율 라인을 최소 1시간 내에 떠올리면 뚱땅거리는 정용도의 콘트라베이스와 사각거리는 한웅원의 하이햇이 물 흐르듯 트리오만의 재즈 스타일을 완성해간다. 최근 변박이나 빠른 박자 대신 3박, 4박으로 회귀하는 ‘신 재즈’의 흐름도 도입했다. 총 10개의 자작곡으로 완성된 새 앨범은 스윙으로 시작해 비밥과 뉴올리언스, 살사까지 다 장르를 오간다.
오랜 음악 ‘지음(知音)’인 이들은 다만 “딱히 어떤 장르를 정한 상태에서 곡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10여년의 기간 클럽공연으로 합을 맞춰온 이들에게 작곡은 곧 인터플레이 자체다. 의도치도 않았는데 어느샌가 즉흥연주를 하다보면 다양한 재즈사 여러 갈래에 닿아 있다. “지난 몇 년 간은 합이 맞아지는 과정이었다고 봅니다. 이젠 연주만 해도 서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옵니다.”(고희안)
다양한 스타일을 내세웠지만 타이틀곡 ‘Snap’을 중심으로 앨범의 무게추는 스윙에 있다. “어릴적부터 카운트 베이시의 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피아노로 스윙하는 분들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이번 5집은 다양한 스타일이 있지만, 저희 만의 잘 갖춰진 스윙필을 조금 더 전면에 내세운 앨범입니다.”(고희안)
더블베이시스트 정용도. 사진/고희안트리오
‘Snap’의 주제 의식은 앨범 전체의 메시지도 실바늘처럼 관통한다. 살면서 ‘어쩌면 흘려보냈을 지도 모를 것들’을 낚아챈다는 뜻. 1시간 여 앨범 내내 빗방울의 서정(‘In the Middle of Raindrop’)이나, 고속도로를 달리며 뒤로 젖혀지는 풍경(‘Highway’), 묵혀뒀던 나이지리아나 쿠바의 여행 같은 기억들(‘Nigeria’, ‘Habana’)이 흘러간다.
“여행을 가면 내가 알던 세계 이면의 것들을 보고 영감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몇 년 전 처음 가본 나이지리아에서 그런 것들을 느꼈습니다. 상당히 가난한 나라 같았지만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 호텔 밖으로 자주 나가지 못할 만큼 치안이 위험하다는 것.”(고희안)
드러머 한웅원. 사진/고희안트리오
드러머 한웅원은 앨범 녹음 이후 단계, 믹싱과 마스터링에도 직접 참여했다. 드럼 외에도 여러 악기를 다루고 지난 10년간 공연 현장의 소리를 잡아온 그는 “믹싱과 마스터링 때 최대한 라이브 현장감을 살리자는 데 중점을 뒀다”며 “최근 대중음악계에선 음압을 최대한 높이는 방향으로 작업하는데, 이를 조금 포기함으로써 소리의 자연스러움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더블베이스의 정용도는 다른 재즈뮤지션들과 다른 고희안트리오 만의 차이점을 묻는 질문에 “듣는 이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아슬아슬한 음악”이라며 “‘틀릴 수 있는 길’을 가보는 우리의 연주는 타 뮤지션들의 안정된 사운드와 가장 구별되는 점이 아닐까 한다”고 답했다.
이들의 새 앨범 작업이 1년이나 걸린 건 지난해 한일 관계 등의 정치적 이슈 때문이다. 멤버들은 “미래지향적으로 보면 일본과 한국은 결국 함께 가야한다고 생각한다”며 “문화적으로 두 국가가 융합할 수 있도록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 한국의 실력 있는 재즈뮤지션들이 새로운 항로를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밴드는 오는 14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새 앨범 발매기념 콘서트를 연다.
고희안트리오와 일본 구마모토현 야츠시로 재즈클럽 ‘Jazz First’ 공연 관계자들. 사진/고희안트리오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을 여행지에 빗대달라는 요청을 건넸다. 고희안이 독주를 펼치듯 답변을 내놨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는 관광지는 일단 아닌 것 같아요. 그것보다는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치는 곳 같은 느낌이 아닐까요? 그런데서 느껴지는 작은 행복 같은 것.”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작은 미소를 짓게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으면 해요. 우리들도 어디까지 여행할지는 몰라요. 다만 그런 여유, 좋잖아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