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순진한 대법원장님'_법관들이 분노하는 이유
2021-02-05 03:00:00 2021-02-05 07:56:59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가 사의를 전달하기 위해 김명수 대법원장을 찾아간 그날의 대화가 4일 공개됐다. 녹음파일과 이를 풀어 놓은 녹취록까지 나왔다.
 
작년 5월 그날, 두 사람의 독대에서 '탄핵' 얘기가 나온 것은 확인됐다. 정반대의 주장이 대립한 진실게임에서 임 부장판사가 일단 승리했다. 같은 날 국회는 임 부장 판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당장 김 대법원장이 수세에 몰렸다. 오래 전부터 현직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을 기획해 온 여권에 대법원장이 부역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면피를 위해 판사의 사의를 거부했다는 비겁한 대법원장이라는 조롱도 들린다. 이를 차치하고라도 김 대법원장은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거짓말쟁이가 됐다. 야당을 중심으로 탄핵이 추진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커버' 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런데, 과연 진실일까. 아침부터 후두부를 묵직하게 강타 당한 뒤 다시 맴도는 질문이다.
 
2020년 5월 두 사람의 '그날'로 돌아가 보자. '재판 개입 사법농단' 혐의로 기소된 임 부장판사는 그해 2월14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법농단(또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제기 이후 임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 주장이 정치권에서 나온 건 2018년 11월이다. 법복을 벗어 던지고 싶었을 임 부장판사의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그의 변호인은 임 부장판사가 '담낭 절제·신장 이상' 등으로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고 한다. 법관생활 29년을 마감하려는 그의 심정은 비참했을 것이다. '그날' 만난 김 대법원장의 '탄핵' 발언은 그래서 더 임 부장판사에게 남았으리라. 
 
임 부장판사 측이 공개한 그날 김 대법원장의 발언은 우회적이지 않았다. '정치적인 상황도 살펴야 되고'라든지 '지난 번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임 부장이 사표 내는 것은 난 좋아'라는 발언이 그렇다. '더 툭 까놓고 얘기하면 지금 뭐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 수리했다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 말이야'라는 대목에서는 듣는 귀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다 일까? 공개된 녹음파일과 녹취록  앞뒤로 다른 말은 없었을까? 30년 가까이 법원에서 함께 일한 당시 두 사람의 관계는 어땠을까? 그날의 독대는 시종 어두웠을까? 김 대법원장은 법복을 벗겠다는 후배 판사에게 면전에서 '나도 좋다'라고 말 할 정도로 임 부장판사가 어서 나가주기를 바랐을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임 부장판사는 왜 당시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했을까? 녹음을 시작한 시점은 독대 전일까, 아니면 중간일까?
 
타임슬립을 하지 않는 한 이 의문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날의 당사자들이 지금도 있지만 서로의 기억이 같지 않으니 더욱 그렇다. 
 
후두부 강타의 충격을 가라앉히고 다시 녹음파일과 녹취록을 보자. 이번만큼은 한번쯤 숲보다 나무를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두 사람은 그날 매우 '공적인 주제'를 두고 매우 '사적인 대화'를 나눴음은 진실에 가까운 듯 하다. 김 대법원장의 다소 격에 맞지 않는 단어 선택과 틈틈이 읍소하듯 수긍하는  임 부장판사의 음성을 보면 그렇다. 사법연수원 2기수 차이로, 60세 안팎의 법원 내 최고 고참 노법관들인 두 사람. 이들 끼리는 살가운 정이 없이도 어느정도의 '이심전심'의 사적 대화가 가능했지 않았을까. 실제로 임 부장판사는 김 대법원장 인사청문회 준비단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 
 
임 부장판사가 당시 대화를 녹음한 행위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문제돼 보이지는 않는다. 소박한 지식으로도 민사상 제3자의 대화를 무단으로 녹음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본인이 대화의 당사자였다면 '몰래 녹음'도 가능한 것으로 안다. 당시 임 부장판사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앞서 미리 상상한 바다. 그러나 독대를 작심하고 녹음하고 이날 그 중 일부만 골라 공개한 것은 어느모로 보나 두고두고 구설에 오를 일이다.  
 
김 대법원장 역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지난 3일 국회에 제출한 답변에서 “임 부장판사에게 탄핵 문제로 사표 수리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없고, 임 부장판사가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거짓말이다. 법관들은 이 부분에서 분노하고 있다. 한 중견 부장판사는 "다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거짓말 한 것을 두둔할 수는 없다"고 했다. 두 사람을 모두 아는 한 법관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장이 너무 순진했다"고 말했다.
 
경위와 진실이 어떠했든 법원, 그중에서도 이번에는 대법원장이 정치권에 코가 깊이 꿰어 또다시 끌려다니기 시작했다. 지루한 풍경이다.
 
최기철 사회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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