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효선 기자] “인터넷 세계에서의 전송은 무상이 원칙이다.(넷플릭스)”
“원고 측이 2014년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에 제출한 확인서 등에 의하면 원고는 2014년 당시 ISP인 컴캐스트와 AT&T, 버라이즌, TWC에 ‘착신망 이용대가’를 지불하고 있었다.(SK브로드밴드)”
“원고들이 피고에게 ‘연결에 관한 대가’를 지급할 채무를 부담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이상 그 범위가 확정되지 않았더라도 원고들의 청구는 전부 이유 없다.(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
지난달 25일 글로벌 CP(콘텐츠사업자) 넷플릭스와 국내 ISP(인터넷서비스제공업체) SK브로드밴드 간 세기의 법적 다툼에서 인터넷 망 대가 관련 새로운 이정표가 될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넷플릭스가 SK브로드밴드를 상대로 제기한 '망 이용대가'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에서 SK브로드밴드 손을 들어줬다. CP와 ISP 간 소송에서 이 같은 판결이 나온 것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다.
그간 국내 망을 ‘무임승차’해온 넷플릭스뿐 아니라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에 정당한 망 이용료를 요구할 수 있는 중요한 선례가 제시된 것이다.
SK브로드밴드가 1라운드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던 배경엔 법무법인 세종의 전략이 있었다. 이 판결을 이끌어내기까지 세종은 반년 가까이 시간을 쏟으며 내부 팀 간 협업에 주력했다.
특히 강신섭 세종 대표변호사는 수개월간 직접 법정에 참석해 변론했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 위치한 ‘디타워’ 빌딩에서 강 대표를 만나 이번 판결의 의미를 들었다.
글로벌 CP 망 이용료 청구 법적근거 마련
SK브로드밴드 측 승소로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업계에서는 국내 ISP가 글로벌 CP에 정당한 망 이용료를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망 사용료를 내고 있는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CP사들의 반발도 잠재울 수 있게 됐다.
그 과정은 지난했다. 강 대표 등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들의 고심도 컸다. 강 대표는 국내 OTT 산업 에 독이 되지 않는 선례를 남기기 위한 사명감으로 이 소송을 준비했다고 한다. 원고 측 소장을 받고 나서 답변서를 내는 데 4~5개월 정도 걸렸다.
강 대표는 “인터넷 망 이용으로 혜택을 입은 당사자는 그에 따른 비용을 부담한다는 이 평범한 원칙을 확인하는 내용이었는데 선례가 없어 어려웠고 자칫 잘못된 선례가 되면 독이 될 수 있는 만큼 신중했다”고 말했다. 그는 “OTT 산업 최초의 선례를 만든다는 사명감이 있었다”며 “선례가 없다보니 재판부에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도 중요했다”고 밝혔다.
강 대표는 이번 선례를 마련하기까지 세종의 송무팀과 TMT(방송통신기술)팀 협업의 힘이 컸다는 점을 강조했다. 송무팀의 변론 전략과 TMT팀의 OTT업계에 대한 전문성을 더해 시너지를 극대화하는데 모든 여력을 집중했다는 부연이다.
그는 “송무팀과 TMT(방송통신기술)팀의 협업이 좋았다”면서 “매주 진행한 세미나를 통해 함께 공부하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판례를 찾았다”고 설명했다.
특히 TMT팀이 찾아낸 해외 판례는 재판부를 설득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강 대표는 “ISP와 CP간 소송, ISP와 ISP간 소송 등 여러 소송들이 있지만 이 사건에 딱 맞는 법령이나 해외 판례는 없었다”면서 “다만 ISP가 CP로부터 인터넷망 이용의 대가를 받는다는 내용이 담긴 해외 판례를 찾아냈다”고 말했다. 지난해 미국 연방 콜롬비아 항소법원 판결(ISP 대 FCC 소송)과 2013년 프랑스 파리 항소법원 판결(ISP 대 ISP 소송) 등이다.
강신섭 세종 대표변호사. 제공/법무법인 세종
트리거는 ‘넷플릭스 부사장 진술서’
프랑스 통신사 오랑주(구 프랑스텔레콤) 소송 관련 판결문에는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ISP사가 CP사에 망 이용료를 부과하는 것은 불공정 거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지난해 미국 연방 콜롬비아 항소법원도 ISP사 인수합병(M&A) 관련 소송에서 ISP가 CP사에게 자사 가입자들을 연결해주는 대가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강 대표는 “(넷플릭스와 SKB 소송과) 똑같은 내용은 아니지만 이들 판례에는 CP가 망 이용료를 낸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며 “두 가지 해외 판례를 통해 망 이용료가 무상이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을 끌어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승소를 이끌어낸 결정적 '트리거'는 넷플릭스 켄 플로렌스(Ken Florance) 콘텐츠 전송 부문 부사장의 진술서였다.
강 대표는 “국내 ISP에 망 사용료를 낼 수 없다던 넷플릭스 측 부사장이 미국의 컴캐스트, AT&T 등에는 망 사용료를 냈다는 진술서를 발견했다”며 “이 확인서가 법원을 설득시키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망 사용료가 무상이라던 넷플리스 측 주장과도 배치되는 내용이다.
“망 사용료 문제는 민법으로 풀어야”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일각에선 글로벌 CP가 국내 ISP에 망 사용료를 내도록 하는 규정안을 마련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이 같은 시각에 강 대표는 다소 조심스런 입장을 내비쳤다. 그는 “빠르게 변화하는 OTT 시장은 일률적으로 법률을 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며 “ISP와 CP사 간 자율적 협의에 맡기고, 협의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 법원의 판결에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망 사용료 문제는 ISP와 CP간 협의가 우선되고 이번 판결을 기반해 민법으로 풀어가는 방식이 최선이라는 의견이다.
이번 판결은 전 세계 OTT업계 뿐 아니라 사법부의 판단 가이드라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강 대표변호사는 “유튜브를 운영하는 구글은 사실 넷플릭스 보다 훨씬 큰 상대”라면서 “법원의 이번 판단은 앞으로 구글 등 망 이용료에 대한 소송에도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4분기 기준 구글의 트래픽 사용량은 25.9%로 국내 ISP에 망 사용료를 내고 있는 네이버(1.8%), 카카오(1.4%)의 14~18배에 달한다. 넷플릭스(4.8%) 보다도 5배 큰 규모다. 넷플릭스가 부담하게 될 망 이용대가는 수백억원으로 추정된다. SK브로드밴드의 추산에 따르면 넷플릭스에서 받아야 할 망 사용료는 2017년 15억원에서 지난해 272억원으로 급증했다.
강 대표는 “항소심이 진행되면 망 사용대가 청구액 문제도 다뤄질 텐데 수백억에서 많으면 1000억원 가까이 될 수도 있다”며 “다만 아직은 더 정확한 계산을 해봐야 한다”고 답했다. 항소심 전략에 대해서는 “넷플릭스 측 항소이유서를 보고 그에 따른 대응 전략을 세울 예정”이라고 했다. 넷플릭스는 오는 16일까지 항소장을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강신섭 세종 대표변호사. 제공/법무법인 세종
박효선 기자 twinseve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진규 온라인뉴스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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