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돈을 빌릴 당시 변제 의사가 있었다면 이후 갚지 못해도 사기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A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사기 혐의를 유죄로 판단한 원심을 깨고, 다시 판단하라며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되돌려보냈다고 21일 밝혔다.
재판부는 "돈을 빌릴 당시에는 변제할 의사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비록 그 후에 변제하지 않고 있더라도 이는 민사상 채무불이행에 불과하며 형사상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파기환송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피고인이 후에 갚겠다'고 말한 것을 기망으로 보기도 어렵다"며 "변제 조건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다"고 했다.
차용 당시 변제 능력에 대해서는 "피고인은 방송국에서 과장으로 일하면서 2014년에 연봉 7550만원, 2015년에 6940만원 가량 소득을 올렸다"며 "2억700여만원의 채무를 부담하고 있었으나, 그 채무 전액에 관해 변제기가 도래했다거나 변제독촉을 받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2017년 4월 27일 피해자의 변제독촉으로 비로소 변제기에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며 "피고인의 채무불이행은 실직으로 인한 경제사정의 악화라는 사후적 사정변경 때문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경제사정은 방송국에서 해고된 2016년 12월 이후 급격히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며 "피고인이 차용 당시 '자력 부족으로 차용금을 2015년 2월 말까지 변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거나, 그럼에도 차용을 감행함으로써 변제불능의 위험을 용인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어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돈을 융통할 곳이 없다'며 자신의 신용부족 상태를 미리 고지한 이상, 피해자가 변제불능 위험성에 관해 기망 당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A씨는 지난 2000년쯤 피해자와 같은 회사 동료로 만났다. 피해자가 홍보·행사 회사를 창업하고 A씨가 방송국에 이직한 뒤에도 업무상 종종 연락했다. 2014년에는 A씨가 있는 방송국 외주 프로젝트로 10개월간 함께 일했다.
이듬해인 2015년 2월 1일쯤 A씨는 피해자에게 2000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때 "돈을 융통할 곳이 없다"며 "2월 말까지 갚겠다"고 말했다. 당시 A씨의 채무는 2억700만원 상당이었다. 결국 A씨는 돈을 갚지 않아 지난해 1월 사기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과 2심은 A씨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할 가능성을 알고도 돈을 빌려, 적어도 미필적인 편취 범의가 있었다며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 청사. 사진/대법원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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